이은혜 글항아리 대표어떤 책은 두 권씩 사게 된다. ‘라신에 관하여’,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프루스트와 기호들’ 등. 갖고 있는 걸 깜빡하고 다시 산 게 아니다. 밑줄을 너무 많이 긋고 메모를 너무 많이 해 다음번엔 새것으로 읽고 싶어서다.
김지승 책 제목의 ‘마지네일리아(marginalia)’는 여백(margin)에 있는 것들이란 뜻이다. 즉, 흰 모서리에 남긴 주석, 메모, 삽화를 일컫는다. 저자는 자신이 여백에 빽빽이 메모하며 능동적으로 읽은 책 17권을 소개한다. 리스펙토르, 모리슨 등 모두 여성적 글쓰기를 한 작가들이다. 17명의 세계를 삼키고 빨아들였더니 가장 풍부해진 것은 바로 김지승 자신이다. 그의 문장 어딘가엔 빛과 어둠이 스며 있고, 또 어딘가엔 냄새가 배어 있다. 하지만 그런 문장을 모방하긴 어려운데, 책 속에서 건져 올린 것이 아니고 모두 변태를 거쳐 삶이라는 고치를 뚫고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적 글쓰기는 여러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것은 확실성, 정답, 단일성을 거부하고 모호성, 질문, 복수로 나아간다. 또한 여성적 독해는 내 언어로 환원하지 않고 타자의 언어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읽는 것이다.
나는 다 본 책을 중고서점에 팔거나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지 못한다. 모든 책에 밑줄과 메모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기억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통해서뿐 아니라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통해 되살아나기도 한다. 과거를 소환해 줄 텍스트가 많다는 것은 앨범이나 친구를 많이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책을 소유하고, 거기에 메모를 하자. 훗날 그 여백을 다시 보게 될 때, 거기 밴 시간과 냄새는 닳고 닳은 나에게 삶을 다시 한번 붙들 수 있는 힘이 돼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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