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신록의 숲에서 느껴지는 싱싱함이 폴폴 배어 나왔다. 한 모금을 넘기자 그 싱싱함이 입안 가득 부드럽게 퍼졌다. 잡맛이 없이 깔끔했다. 커피 마니아는 아니지만 시중에서 파는 일반 커피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윽하고 신선한 맛이 분명했다. 제주에서 길러진 ‘코리아커피’와의 첫 만남이었다.
10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리 태흥초등학교 옆. 빨간 지붕의 아담한 카페 건물과 비닐하우스 등이 자리하고 있다. 커피나무가 자라고, 이 나무에서 얻은 커피를 체험할 수 있는 농장이다.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크고 작은 커피나무가 빼곡히 자라는 중이었다. 푸른빛, 붉은빛의 커피 열매가 달렸다. 붉은빛이 도는 열매(일명 커피체리)는 수확이 가능했다. 다른 나무에서는 하얀 커피 꽃이 피었다. 라일락 꽃보다는 덜하지만 달달한 향기가 풍겼다.
농업회사법인 코리아커피 노명철 대표(54)가 농장과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공. 노 대표는 2005년부터 국내 최초로 커피나무를 대량으로 재배한 주인공이다. ‘브라질커피, 케냐커피’ 등과 같이 한국에서 생산한 커피라는 뜻으로 ‘코리아커피’라고 명명했다. 커피는 아프리카나 남미처럼 적도 부근 열대가 원산지이다.
“커피나무를 열대에서만 재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꿔 보고 싶었습니다. 커피를 너무 좋아해서 직접 커피를 생산하고픈 욕심도 있었고요. 제주에는 파인애플 바나나 한라봉 등으로 비닐하우스 노하우가 풍부했고 조직배양, 양란 재배 경험 등을 활용한다면 커피나무를 키울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커피나무 대량 재배에 성공한 노명철 대표. 신선한 향, 깔끔한 맛이 일품인 ‘코리아커피’를 만들어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 시행착오를 넘어서
커피나무를 재배하기 이전 노 대표는 양란으로 꽤 높은 소득을 올렸다. 대학 졸업 이후 금융권에 잠시 몸을 담았으나 조직배양 후 1년만 기르면 포기당 3만 원을 하는 양란에 매력을 느꼈다. 1990년을 전후해 고향인 경기 안양, 과천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양란 사업을 했다. 양란농장에서 무보수로 일하면서 조직배양 기술을 습득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양란이 훌쩍 자라는 제주의 자연환경에 주목해 1996년 제주로 터를 옮겼다. 순탄했던 양란 사업은 제주도가 추진한 호접란(양란의 일종) 대미 수출이 실패로 끝나면서 한풀 꺾였다. 이 사업에 참여했던 노 대표는 “모종을 미국에 가서 심으면 수확, 판매가 가능할 것으로 봤다. 하지만 어린 싹이 현지 토양과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꽃조차 피우지 못했다. 너무 만만하게 봤고 경험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호접란 사업 실패와 함께 양란시장도 시들해지면서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커피에 눈을 돌린 노 대표는 하와이 현지로 날아가 커피 씨앗 3만 개를 구입했다. 커피나무 재배를 처음 시작한 곳은 제주시 일대였다. 기온이 문제였다. 영하로 내려가는 제주시 날씨가 발목을 잡은 최대 복병이었다. 비닐하우스에 난방을 하는 가온을 하면 가능하지만 무(無)가온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계속 제주시에 머물 수 없었다.
4년 전 한라산 이남인 태흥리 지역으로 농장을 옮겼다. 하와이 커피 씨앗에서 나온 커피나무 가운데 1200그루 정도만 남았지만 무럭무럭 자랐다. 하우스 커피나무는 야외에서 재배하는 해외 커피나무보다 2배가량 생산량이 많았다. 수분과 온도를 조절할 수 있고 영양제 투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농업회사법인 코리아커피 노명철 대표가 신선한 향, 깔끔한 맛이 일품인 ‘코리아커피’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세계적인 커피를 향해
“커피나무 재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양란 조직배양은 6개월이면 새로운 싹이 나오지만 커피는 16개월에서 최장 24개월이 걸려요. 커피나무를 재배하면서 몇 년 동안 소득이 없이 계속 투자만 이뤄졌어요. 경제적 고통도 컸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커피 판매도 이뤄지면서 나아졌어요.”
노 대표는 조직배양을 거쳐 10년생 미만 6만 그루의 커피나무를 보유하고 있다. 커피나무는 3년생가량부터 수확이 가능하다. 7년생 정도면 1년에 5∼6kg의 열매를 수확하고, 열매를 가공하면 1kg의 원두를 얻는다.
제주에서 생산된 코리아커피 원두는 kg당 30만 원가량으로 kg당 7만∼10만 원 하는 외국산에 비해 훨씬 비싸다. 세계 3대 커피(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하와이 코나, 예멘 모카) 등 유명 커피 원두 가격과 비슷하다. 독점 및 소량 생산이라는 특징 때문에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갓 딴 열매에서 생두를 얻고, 생두를 그 자리에서 볶아 원두를 만들고, 곧장 가루로 갈아서 마실 수 있는 것은 가장 큰 매력이다. 열매 껍질을 벗겨내지 않고 그늘에서 말려 본연의 향을 오래 간직하도록 하는 노하우도 가졌다. 노 대표는 아내 선우경애 씨(48·동양화가)와 함께 커피로 그림 그리기, 향주머니 만들기, 바리스타 실습, 모종 키우는 법 등 커피 관련 체험 및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노 대표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추위와 병해충에 강하고 생산량이 높은 5그루를 선발했다. 신품종 등록을 할 계획이다. 제주에서 커피 농사에 도전하는 희망자에게 노하우와 기술 등을 전수하겠다. 3년쯤 뒤에는 신품종 커피나무를 들고 세계 유명 커피가 모두 모인다는 하와이에 가서 심겠다. 세계 커피 시장에 ‘코리아커피’를 알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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