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PTSS 경찰관 7명 인터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5일 19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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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임수현(가명·40) 경장

-인천○○경찰서 출신.
-2010년 11월 23일 오후 인천 옹진군 연평도 포격 당시 파출소에서 근무하던 중 옆 건물에 포탄이 떨어짐.
-환청, 불면증, 건망증, 집중력 저하 등 경험. 1년간 정신과 진료 받으며 휴직.
-2013년 12월 13일 수도권 임 경장의 고시원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 상황은?

"인천○○서 근무 당시 4박5일 일정으로 연평도에서 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어요. 연평도를 떠나기 하루 전이었습니다. 멀리서 '쿵쿵쿵' 소리가 들리더군요. 원래 예정돼 있었던 해병대 포격훈련인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옆 건물에서 '쿵' 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며 유리창이 깨졌어요. 파편이 튀었는데 유리창을 뚫고 화장실 철문을 관통했더라고요. 그 파편이 몸에 박혔으면 바로 사망이었을 겁니다. 포탄이 터졌을 당시 허벅지로 열기가 확 왔어요. 그 열기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계단으로 대피한 뒤 밖으로 나와 보니 주변에는 연기가 자욱한 채 불이 나고 있었어요.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어요. 구급차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고요. 그런데 꿈속 일이었던 것만 같아요. 내가 당시 어떻게 행동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요. 옥상 전선줄에 불이 붙어 일단 물을 퍼다 날라 불을 껐어요. LP가스통이 쌓여 있는 옆 건물로 불이 옮기지 않도록 진화 작업을 했어요. 만약 해당 건물이 포격됐다면 연쇄 폭발로 인해 목숨을 건지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 포탄이 파출소를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던데.

"당시 파출소가 있던 위치가 연평도에서는 행정 타운에 해당하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행정관서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졌더라고요. 옹진군청 바로 옆 건물이 포격 당했고, 파출소도 바로 옆 건물이 터졌어요. 2차 타격 때는 군 유류고를 정확히 조준해 폭탄을 날렸더라고요. 그걸 알고 나니 소름이 돋았어요. 북한군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연평도는 물론이고 인천에 있으면 언제 폭탄에 맞아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가족에게 연락했나.

"포격으로 인해 통신이 두절됐어요. 통신이 안 되니까 정말 답답하고 세상과 단절된 것 같았더라고요. 다음 날에야 복구돼 아내와 처음 통화했어요.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연평도에서 떠난 것은 언제인가.

"10일간 현장에 머물렀어요. 사건 직후 2, 3일간 너무나 무서웠어요. 도망가고 싶었고요. 언제 북한군이 고무보트 타고 바다를 건너 와서 타격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포로가 생기면 경찰부터 죽인다는 말이 생각났어요. 군은 제네바협정 때문에 죽일 수가 없는데 경찰은 얼마든 죽일 수 있다는 옛 동료들의 이야기였어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탈출 경로만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어요."

―왜 육지로 복귀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나.

"바로 다음날(24일)에 경찰 인력이 충원됐어요. 저야 빨리 도망가고 싶었죠. 그런데 없던 인원이 충원되던 상황에서 나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승합차를 몰아 항구에서 파출소로 경찰과 기자를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어요. 이때 극심한 스트레스가 쌓였던 것 같아요."

―어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나.

"폭탄이 옆 건물에 떨어졌던 당시 상황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며 집착이 시작됐어요. 연평도에서 나오자마자 병원 정신과에 방문했어요. 진단 결과가 심각했어요. 계속 스트레스 사건에 묶여 있고, 우울증 증세도 있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하지만 병원비가 비싸서 1개월 정도만 다니다가 말았어요. 검사비만 30만~40만 원이고 진료 받을 때마다 3만 원 정도를 내야했거든요. 개인적으로 들어둔 사설 보험이 있었는데 (정신과 진료는) 보험 처리가 안 되더라고요. 당시에는 공무 상 요양(공상)으로 처리해 치료비를 지원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처음에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저를 이상하게 볼까봐."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일들에는 무엇이 있었나.

"청각이 가장 강했어요. 사건 이후 불법 조업 중국어선 단속 함정으로 발령받았어요. 선실에 누워 자려고 하면 파도가 함선 옆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소리가 마치 포성처럼 들렸거든요.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누구한테 이야기할 수도 없었어요. 함정 근무하는 사람인데 주변에 누구한테 '파도가 무섭다'고 말할 수 있었겠어요. '펑' 하는 환청도 들렸어요. 깜짝 놀라서 깨면 같은 방을 쓰는 동료들은 아무 말도 못 들었다고 해요. 미치겠더라고요. 길을 지나가다가 폭죽 소리나 공사 소리가 들려도 깜짝 놀라고 괴로웠어요.

―휴직 치료가 필요하다고 느낀 시점은 언제인가.

"환청에 시달린 지 3, 4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에요. 2012년 4월 병원을 다시 찾아보니 담당의가 휴직을 강하게 권했어요. 다음 달인 2012년 5월부터 휴직에 들어갔어요. '왜 한참 지난 연평도 얘기를 이제 끄집어내서 휴직하려고 하냐'는 반응도 있었어요. 물론 따뜻한 시선을 보내준 동료도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제대로 마음을 열수가 없었어요. 기댈 곳이 없던 거죠."

―대인기피증인가.

"네. 휴직 후에는 휴대전화 자체를 아예 없애고 사람도 만나지 않았어요. 지인과 밥 먹기는커녕 통화도 한 적이 없어요. 외출할 때 항상 모자를 쓰는 습관도 생겼어요. 단기기억력도 악화됐어요. 건망증이 생겼어요.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집중력도 줄어든 것 같아요."

―가족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했나.

"'인천이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은 전부 지방 처갓집으로 내려 보냈어요. 가족과 떨어져 산지도 1년 넘었어요. 지금은 2, 3주에 한 번 정도 보고 있어요. 원래 가족 모임에 적극적으로 나가던 편이었는데 사건 이후 모임에 나가는 걸 꺼리게 됐어요.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도 아내가 눈치 챘어요. 세 자녀를 전처럼 편하게 대하기도 어려워졌어요."

―휴직 기간 동안 어떻게 치료했나.

"매일 산에 오르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턱걸이를 했어요. 목덜미를 따라 땀이 흐르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 걷다보면 낯선 사람을 대할 용기가 생겼어요. 수요일마다 등산복 대신 청바지를 입고 정신과를 찾았어요. 좋은 영화도 많이 찾아보려고 노력했어요.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수십 번 돌려봤어요. 주인공이 버스정류장 벤치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여성을 찾아 달려가는 장면에서 항상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난 언제쯤 이 어두운 고시원을 박차고 나가 저렇게 사람들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었어요."

―옛날로 돌아간다고 해도 경찰을 선택하겠나.

"경찰에 대한 애착은 굉장히 강해요. 가능하다면 다시 내 능력의 한계가 어디인지 부딪혀보고 싶어요. 하지만 당장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요.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당시 연평도 근무에는 절대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권오청 경장(33)

-목포해양경찰서 출신
-2009년부터 2012년 5월까지 불법 조업 중국어선을 단속하며 칼을 휘두르는 중국인 선원들과 반복적으로 대치.
-공황장애. 현재 치료용 향정신성약물 복용.
-2013년 12월 18일 오후 전남 목포시 산정동 목포해양경찰서 외사계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어떻게 해경이 됐나.

"2008년 8월 중국어 특채로 임용됐습니다. 중국에서 5년간 살며 대학을 나와 중국어에 능통했거든요. 경찰인 누이의 조언으로 해경 시험을 치러 합격했어요.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함정 근무에 나서게 된 계기는 뭔가.

"중국어선 단속에는 통역 요원 동승이 필수적이에요. 선장과 선원에게 경고 방송을 하고 필요한 서류를 갖췄는지 질문하고…. 처음부터 함정 근무를 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통역 요원이 많지 않다보니 임용된 뒤 4년 간 계속 함정 근무만 했어요. 원래 함정 근무는 스트레스도 심하고 업무 강도도 높기 때문에 1, 2년 단위로 돌아가면서 하거든요. 7박8일 함정 근무를 월 2차례가량씩 계속해서 나갔어요.

―함정 근무를 하면 일상이 어떤가.

"출퇴근이 안 되는 게 가장 큰 문제고, 낮과 밤도 없어요. 항해 중에는 4시간 근무 후 6시간 휴식하는 식으로 3교대 근무를 해요. 오전 8~12시에 근무를 섰으면 점심식사 후 20시까지 쉬는 식이에요. 이런 식으로 7박8일 근무해요. 그런데 휴식 시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요. 항해 중 불법 조업을 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어선이 발견되면 휴식 중이던 대원도 전부 깨워 '전원 출동' 혹은 '출동대기' 상태로 돌입하기 때문입니다. 금어기(6~8월)에는 7박8일 근무 중 사건이 2, 3차례 정도만 발생하지만 성어기(1월 등)에는 하루에도 1, 2차례 출동 명령이 떨어져요. 사실상 휴식이 없다고 보면 돼요. 대부분 근무복을 입은 채로 벽에 기대어 조는 식으로 휴식을 취해요. 사건 유형은 △불법 조업 어선 단속, △화재 선박 인명구조, △조난 선박 구조 등인데…. 불법 조업 어선은 7박8일 중 30~40척을 검문·검색하고, 그 중 통상 5, 6척을 검거해요.

―불법 조업 어선 단속 절차는 어떻게 되나.

"△레이더 상으로 선박의 위치를 파악하고, △공해인지 영해인지 구분한 다음, △채증 작업(선박이 항해하는 속도가 3, 4노트면 조업으로 봄)을 하고, △투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검문한다는 방송을 해서, △총기와 채증 장비를 챙겨 단속 단정에 올라요. 단정 1척에는 대원 8명씩 탑승하는 것이 보통이에요. 팀장과 통역은 조타실로 가고, 나머지 대원은 다른 선원과 기관사를 제압해요. 조타실에서 선장을 상대로 서류 등을 조사하고, 만약 법적 문제가 없으면 현장에서 단속을 마무리해요. 그동안 선원들은 구류실(경비함 체육실에 이불을 깔아둔 정도)에 잠시 안내해둡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에 통역은 빠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중국 어선을 단속할 때는 출동부터 검거, 조사까지 모든 과정에 통역이 참여해야 해요. 제가 탔던 배에는 통역요원이 저 밖에 없었어요. 2교대도 못하고 24시간 근무 체제였죠."

―폭력 어선 출연 빈도는 얼마나 높나.

"단속 시 무력으로 저항하는 선박을 폭력 어선이라고 불러요. 2년 전까지만 해도 5~10% 정도만 폭력 어선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 어선이 많아지더라고요. 성어기에는 30~40%가 폭력 어선이에요.

―어떤 사건을 겪었나.

"폭력 어선에 진입해 선원들을 검거하는 과정이 전쟁이나 다름없어요. 흉기를 들고 설치면서 해경 대원을 해치려고 하거나 자해하는 시늉을 하는 중국인 선장들이 많아요. 2009년경 경비함에 탈 때는 흉기를 든 선장의 습격을 받을 뻔한 적이 있어요. 다른 대원들이 선상에서 중국인 선원들을 제압하는 사이 저와 특공대팀장이 조타실로 들어가 중국인 선장과 대치했어요. 이 선장이 칼을 휘두르며 위협하는 걸 간신히 달래가며 대화를 이끌어가야 했어요. 통역이 잘 되지 않으면 갈등을 촉발할 수 있기 때문에 분위기를 잘 이끌어 가는 것이 중요해요. 선장을 달래야 할 때도 있고, 어떨 땐 강하게 나가야 해요.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단속 과정이 길어질 수 있고, 다른 대원들이 다칠 확률도 높아져요. 당시에도 단속 사실을 눈치 챈 다른 중국 어선들이 단속정을 들이받으며 단속을 방해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부담이 굉장히 크죠."

―공황발작을 처음 일으켰을 때 상황은 어땠나.

"5월이니까 성어기는 아니었어요. 교대 근무도 거의 종료되던 시점이었죠. 하루만 더 있으면 육지로 돌아가는 날이었어요. 그런데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점심시간이었어요. 식판을 들고 자리로 가는데 속이 메슥거리더라거요. 주변 대원들이 식판소리와 대화소리가 그날따라 거슬렸어요. 승조원실로 들어가서 앉아있으려니 머리가 핑 돌면서 가슴이 조여 왔어요.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동료가 저를 의무실로 데려갔고, 의무관이 육지에 있는 병원과 화상 연결을 하며 저를 진찰했어요.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의료 헬기가 와서 저를 후송했어요."

―진단이 어떻게 나왔나.

"CT와 혈액 내 산소포화도 등을 검사했는데 협심증(관상동맥 혈관이 수축 등의 원인에 의해 좁아지는 것)은 아니었어요. 구급차를 타고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서 3주간 입원 진료를 받았어요. 신체적 이상이 발견되지 않더군요. 그런데 정신가정의학과에서 검사해보니 '공황장애'라는 진단이 나왔어요. 그 이후로 함정에 단 한 차례도 타지 못하고 2년간 육상 근무를 하며 향정신성약을 복용하고 있어요."

―그 이후로 사건 당시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 적이 있나.

"사건 이후 아내와 영화관에 갔어요. 그런데 마치 '그날'처럼 가슴이 조여 오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어요. 알고 보니 어둡고 좁은 승조원실과 비슷한 환경에 처하니 증상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었어요. 꿈도 가끔 꿨어요. 폭력 어선을 진압하는 꿈, 바다에서 시체를 인양하는 꿈 등…."

―가장 괴로운 일은 무엇이었나.

"사람들이 '저 사람 공황장애다'라고 수군거릴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들었어요. 마음 터놓는 사람이 줄었고…. 답답했어요.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주변에서 '함정근무를 피하기 위해서 그런 거 아니냐'는 얘기도 들리는 것 같았어요. 빨리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씨(40)

-서울지방경찰청 제2기동대 수경(사건 당시) 출신
-전투경찰로 복무 중 1994년 제5차 범민족대회 시위 진압 과정에서 대학생들에게 폭행당함.
-자해, 돌방행동 등을 반복. 현재 정신병원에 입원 중.
-이 씨의 아버지(70)를 2013년 12월 18일 전남 목포시 석현동의 한 아파트 경비실에서 인터뷰. 이 씨 본인은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라 인터뷰 불가.

▽일문일답

―사건이 발생한 것은 언제인가.

"중고교 때는 개근상도 타오던 착실했던 아들이었어요. 정신병은 커녕 단지 성격이 소극적인뿐이었죠. 1993년 2월 전투경찰로 입대한 뒤 서울지방경찰청 제2기동대 25중대로 배치돼 군 복무를 했고, 1995년 5월 만기전역하기 전까지 무수한 시위 현장에 나가 현장에서 시위대를 진압했어요. 그러다가 1994년 8월 15일 서울대에서 제5차 범민족대회가 열렸어요. 한총련 대학생 8000여 명이 모였어요.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에 끌려가 쇠파이프로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맞았어요. 경찰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니 뇌진탕, 다발성 타박상이었어요. 보름간 입원치료를 받았어요. 그런데 지휘관이 빨리 퇴원하라고 강요해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어요. 부대로 돌아가서는 선임병들로부터 '네가 잘못해서 시위대에 고립됐다. 부대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폭행을 당했어요. 아들이 자괴감과 모멸감 등 상당한 심적 고통을 받아 날마다 진통제를 복용했어요.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복무 중 정신이 여러 번 오락가락해서 후임들 모아놓고 칼을 휘두른 적도 있다더라고요."

―아들이 만기 전역한 후 왜 바로 정신과에 보내지 않았나.

"제 잘못이에요…. 아들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까봐 보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갈수록 상황이 심각해졌어요. 1999년 7월 병원에서 처음으로 진단을 받았어요. 옆에서 시비를 걸면 화가 조절이 안 되고, 충동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알코올중독, 양극성장애, 충돌조절 장애, 기억력 감퇴, 우울증…. 안 걸리는 정신질환이 없었어요. 이때 바로 국가유공자 소송에 나섰어야 했는데…."

―전역 후 어떤 일들이 있었나.

"악몽을 꿨다며 갑자기 깨고, 중간에 일어나 소리를 지르는 날이 많았어요. 자기 형한테도 칼을 휘두르면서 '죽이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2010년 겨울부터는 집 밖에 전혀 나가지 않고 식사도 안 했어요.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안에만 있었어요. 자살 시도도 했어요. 밖에 나가서 난동을 부리다가 경찰로부터 연락이 온 적도 많아요. 2011년 1월에는 정신과에서 격리 판정을 내려서 1개월간 폐쇄병동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 후로 병원에 전혀 가지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얼마 전 간신히 병원에 입원을 시킨 거예요. 가족들이 전부 고통받았어요. 아내와 나도 정신병이 생기기 직전이에요. 아들이 집에 있을 땐 언제 자다가 일어나서 칼을 휘두를지 불안하고. 밖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을 해칠까봐 불안했죠. 가정이 파탄 나는 거예요."

―아드님의 사회 활동이 힘들었을 것 같다.

"전혀 가능하지 않았죠. 대학교에도 보내봤는데 1년 만에 자퇴했어요. 보험공단 자료를 보니까 전역한 뒤 15년 간 일을 한 게 3, 4개월 정도밖에 안 되더라고요. 어딜 가든 금세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정신이 온전치 않으니.

―국가유공자 소송은 어떻게 진행하게 됐나.

"아들이 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지원금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2009년에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어요. 이 때 경찰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진단을 받았어요. 의사가 '여태 찾아오지 않고 뭘 했느냐'고 묻더군요. 가슴이 찢어졌죠. 그런데 전역한지 16년 만에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으려고 하니 당시 폭행당한 것과 정신질환과의 관계를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시위대로부터 구타를 당한 뒤 부대에서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입증하기가 어려웠어요. 부대가 이미 없어진 후라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동료들을 찾기도 어려웠어요. 1심은 졌어요. 그런데 인터넷에 글을 올려 간신히 당시 지휘관 중 1명을 찾을 수 있었어요. 딱한 사정을 듣더니 법정에서 증언을 해주더라고요. 그 덕에 3심까지 가며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았어요."

―지원은 얼마나 나오나.

"정작 7급밖에 인정을 받지 못했어요. 너무 오래돼서 인과관계 입증이 어렵다는 거죠. 등급을 올려보려고 다시 소송을 냈는데 재심이 기각됐어요. 지금은 월 34만 원 나오는 게 전부예요."
●정○○ 씨(30)

-서울 상경(사건 당시) 출신
-의무경찰로 복무 중 선임들이 반복적으로 성추행하고 폭행.
-체중이 20㎏ 증가하고 이상행동 반복. 현재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
-2013년 12월 17일 오전 부산 자택 인근 커피숍에서 정 씨의 아버지(58)를 인터뷰. 정 씨는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였음. 정 씨 아버지와의 인터뷰 내용과 정 씨가 사건 직후 작성했던 진술서와 담당의의 진단서 등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함.

▽일문일답

―아드님이 언제 입대하고 전역했나.

"2005년 5월 의무경찰로 입대했어요. 서울지방경찰청 제2기동대의 한 중대에서 복무했죠. 자대 배치를 받은 뒤부터 2006년 4월경까지 선임들이 계속 성추행을 하고 때렸어요. 5월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 가보니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S)과 적응장애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10월에 의병 전역을 했죠."

―무슨 일이 있었나.

"아들을 괴롭힌 선임이 3명 있었어요. 그 중 A라는 선임으로부터 가장 심하게 시달렸어요. 때리기도 하고…. 그런데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건 내무반에서 성추행하는 거였다고 합디다. 아들이 여자친구와 하루 외박이라도 하고 온 날이면 '성고문'을 했어요. '성기에 물(정액)이 남아있는 지 봐야겠다'며 팬티를 벗기고 (핵심 부위를) 카메라로 촬영하고…. '여자친구와 몇 번이나 (성관계를) 했느냐', '여자친구 (성기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냐'고 꼬치꼬치 묻고 대답을 안 하면 때렸대요. 찍은 사진은 '싸이월드, 학교 홈페이지, 다음 카페에 올리겠다'면서 협박하고요. 그것뿐이 아니었어요. 아들이 자고 있으면 A가 아들 옆 자리에 와서 누워서 아들 가슴을 만지면서 놀았어요. 아들이 교통중대에 속해 있었는데 교통 근무를 나가면 경찰버스(일명 기대마) 안에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어요. 샤워장에서는 아들의 성기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고. 당시 일기장을 보면 '나도 모르게 밤마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선임들을) 죽여버리고 싶다' 이런 내용들이 적혀있어요."

―아들이 당한 피해를 언제 처음 알게 됐나.

"2006년 초 가족이 전부 면회를 간 적이 있어요. 아들이 이상하게 면회실에서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라고요. '왜 그러냐' 물으니 '선임들로부터 괴롭힘 당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군대에서 고생을 많이 하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죠. 그런데 2006년 4월쯤 '도저히 못 견디겠다'면서 집에 전화가 왔어요. 부대가 발칵 뒤집혔어요. 선임 3명은 전부 징계를 받았고요.

―전역 후 아들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나.

"가장 이상한 게 폭식이었어요.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밥을 4끼, 5끼 먹는 겁니다. 체중이 20㎏ 이상 늘었어요. 하루는 방에 불을 지른 적도 있어요. 라이터로 이불에 불을 붙였는데 가구에까지 옮겨 붙었으면 불이 크게 날 뻔했죠. 저는 거실에 있었는데 아들 방에서 방문 사이로 연기가 나오는 거예요. 문을 두드려도 나오질 않고. 소방차까지 출동했었어요. 나중에 '왜 그랬냐' 물으니 '나 괴롭힌 놈들 다 죽여야 한다'고 중얼거리더라고요. 착란 증세까지 온 게 아닌가 싶었어요.

―병원에서 어떤 검사를 받았나.

"문장 완성 검사, 카드 검사, 그림 검사, …. 다양한 검사를 받았어요. 이걸 한 번 직접 보세요." (당시 아들이 검사를 받았던 기록을 보여줌)

〔문장 완성 검사〕="나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을 때 나는 ( )." 등으로 문장을 미완결 상태로 두고 이를 채우는 검사. 정 씨는 대부분 아주 간단하거나 부정적인 대답만 되풀이했음. "나는 나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나는 어렸을 때 (불행했다)." "나는 나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남자들은 (미쳤다)."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 (나는 의경에 입대하지 않겠다)." 등.

〔카드 검사〕=추상적인 카드를 보여준 뒤 어떤 형상이 연상되는지 말하는 검사. 정 씨는 "사람 얼굴이 칼에 찔려서 눈과 목에서 피가 나는 모습" "두 사람이 죽었고 그 가운데 내가 서있다" "제 머리에 칼이 꽂혀있어요" 등 성추행 가해자들에 대한 복수나 자살에 대한 이미지를 표현함.

〔그림 검사〕=그림을 그리도록 한 뒤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검사. 정 씨는 집을 한 채 그린 뒤 "한 남성이 칼을 들고 가서 이 집에 있는 사람을 죽인다" 등 가해자를 찾아가 복수하는 장면을 연상함.

〔대면 상담〕담당의는 정 씨에 대해 "상담 중에도 손톱을 심하게 물어뜯는 모습을 보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기피함. 시선을 계속 아래로 향해 눈을 마주치기 힘듦. 검사 중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뛰쳐나가 다음 날 다시 검사를 시행해야 했음"이라고 평가.

―아드님이 치료는 성실히 받았나.

"전역한 뒤에 1년 정도 병원에 다녔어요. 치료를 받으면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느낌은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는 그것도 하기 싫다며 거부하더라고요. 일도 금방 때려치웠어요. 툭 하면 화를 참지 못하고 터트려버리는 사람을 데리고 있을 직장이 어디 있었겠어요. 직장 동료들이 무슨 대화만 하면 '내 욕을 하는 것 아니냐' '내가 성추행 당한 걸 알고 쑥덕거리는 것 아니냐' 말하면서 덤벼들었으니까요.

―돌발행동을 할 때가 있었나.

"공격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어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옷을 전부 벗어버려요. 제가 하는 인테리어 공사 현장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아들이 갑자기 인부들 앞에서 속옷까지 벗어버리는 겁니다. TV에서 남녀가 연애를 하는 장면이 나오면 거실에서 갑자기 돌아앉어요. '저런 장면을 가족들과 함께 볼 수는 없다' '저 장면을 본 가족들이 내 성추행을 떠올릴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어요. TV에서 성추행 관련 뉴스가 나오면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소리 치면서 리모콘을 집어 던졌어요."
●최재우 경사(41)

-서울 광진경찰서 교통안전계 근무
-2013년 10월 14일 오후 미등록 오토바이 단속 중 오토바이에 치여 30m 정도 끌려가 56일 동안 입원 치료.
-다시 오토바이를 탔을 때 죽을 것 같은 공포감과 호흡곤란 등 경험.
-2013년 12월 20일 오전 서울 노원구 상계동 자택 인근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어떤 사건이 있었나.

"서울 광진구 군자동 화양사거리에서 군자교 쪽으로 향하는 50m 지점에서 교통 단속을 벌이고 있었어요. 흰색 125cc 스즈키 어드레스 스쿠터가 번호판을 달지 않은 채 지나가더라고요. 오토바이를 막고 서서 시동을 끄라고 지시했는데, 운전자가 '왜요?'라면서 응할 기미가 안 보였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오토바이에 꽂힌 열쇠를 뽑으려고 접근하는 순간 오토바이가 급출발했어요. 보통 경찰이 앞에 있으면 옆으로 피해서 도망치는 게 보통인데, 이 운전자는 제 가랑이 사이로 돌진하더라고요. 제 왼쪽 다리가 앞바퀴와 바퀴덮개에 끼는 바람에 제가 오토바이에 매달린 형세가 됐어요. 떨어지지 않으려고 운전자 양 어깨를 손으로 붙잡고 '서라'고 3번 소리쳤어요."

―멈추지 않았나.

"네. 그때 운전자 눈을 봤어요. 운전자가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위로 뜨고 정면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멈출 의사가 없는 눈빛이었죠. 아직도 그 눈빛이 기억나요. 그대로 가속레버를 돌려 속력을 올리더군요. 그 상태로 속도가 시속 60㎞ 이상으로 올라가면 저는 보호 장구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속력을 높이기 전에 오토바이를 세우기 위해 운전자의 어깨를 비틀어 오토바이를 쓰러트렸어요. 30m 정도 끌려간 상태였고요. 오토바이가 쓰러지면서 왼쪽 다리가 오토바이에 꼈어요. 뒷자리에 타고 있던 여성이 도망가려고 하기에 쫓아가려고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안 움직였어요."

―어떤 부상이었나.

"저는 사실 얼마나 다친 지도 모르고 일주일을 지냈어요. 아프긴 아팠는데 병원에서 X레이를 찍어도 별 이상이 없다는 얘기만 하더라고요. 진통제를 맞고 일주일 지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 좀 더 큰 병원에서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어봤어요. 무릎 뼈가 함몰된 상태였어요. 8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어요."

―그 사건으로 인해 어떤 스트레스가 발생했나.

"사실 몸이 다친 건 별로 상관없었어요. 병원에서 회복하면 그만이잖아요. 게다가 제가 단속을 하다가 크게 다친 뒤에 특별진급을 했는데, 그 내용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뜻하지 않았던 격려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어요. '기사를 본 다른 경찰이 혹시나 무리하게 단속을 벌이다가 다치지는 않을까' 하고요. 그런데 기사가 나간 지 이틀 후인 11월 15일에 서울 은평경찰서에서 교통단속을 하던 경찰관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났어요. 저와 상황도 비슷했어요. 오토바이에 치어 쓰러졌는데 뇌진탕 때문에 의식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생각이 복잡했어요. 저의 이른바 '무용담'이 잘못 전해져서 다른 경찰관의 공명심을 자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물론 저 때문일 가능성은 낮겠죠. 그 경찰관이 제 기사를 아예 보지도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결국에는 '나 때문인가'라는 죄책감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결국 그 경찰관은 입원 23일만에 순직했어요. 그 소식을 들은 뒤로 자다가 중간에 깨는 날들이 계속됐어요. 죄책감이 심했어요.

―사건 이후로 오토바이를 다시 탄 적이 있나.

"원래 단속에 활용하던 개인 소유의 오토바이가 있었어요. 예전에 폭주족 단속할 때 참 많이 타고 다녔죠.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오토바이를 탈 일이 없을 것 같아 되팔려고 광진구 화양동 오토바이 가게까지 오토바이를 몰아서 갔어요. 평소에 항상 다녔던 길이에요. 그런데 그 길 15㎞가 마치 지옥 길 같이 느껴지더군요. 시속 40㎞로 천천히 몰았는데도 겁이 나서 손이 떨렸어요. 숨이 가쁘고 심장이 쿵쾅거리고요. 원래 저는 폭주족 단속할 때 시속 80~90㎞로 몰며 곡예 운전도 불사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이걸 대체 어떻게 탔었나' 생각밖에 안들어요."

―다시 단속 업무에 나설 수 있을까.

"힘들 것 같아요. 자동차 단속이라면 할 수 있겠지만 오토바이는 조금…. 이번과 같이 사고가 단속 중 언제든 재발할 수 있거든요."
●이성호 경위(57)

-대구남부경찰서 남대명파출소 근무
-2013년 9월 23일 대구 남구 대명동에서 순찰 근무 중 액화석유가스 폭발로 숨진 고(故) 남호선 경감(51)·전호선 경위(41)의 동료. 남 경감의 시신을 최초로 발견해 수습.
-불면증, 건망증 겪음.
-2013년 12월 16일 오후 남대명파출소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사건 당시 상황이 어땠나.

"남 경감과 전 경위가 포함된 남대명파출소 1팀이 당시 야간 근무를 서고 있었어요. 저는 팀장이었죠. 남 경감과 전 경위가 도보 순찰을 나간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주민센터 쪽에서 '펑' 소리가 났어요. 처음에는 포탄이 떨어지거나 가까운 곳에서 수류탄이 떨어진 줄 알았어요. 약 30초가량 정적이 흐르다가 주민센터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저는 오토바이를 타고 바로 현장으로 출동했죠. 전쟁터나 다름없었어요. 주변 건물들은 유리창은 전부 깨져있었고…. 차량이니 오토바이니 전부 나뒹굴고 있었어요. 이렇게 큰 화재 현장은 처음이었어요. 폭발한 건물 앞에 직경 15㎝가량의 가로수(은행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그 나무가 부러진 채 10m 날아가 길 건너편에 처박혀 있더라고요."

―그곳에서 무엇을 보셨나.

"은행나무 아래를 유심히 보니 사람이 깔려 있었어요. 처음에는 사람인 줄 몰랐죠. 그런데…. 옷이 보였어요. 경찰 조끼였어요. 옆에는 휴대전화와 무전기가 뒹굴고 있었어요. 소름이 돋았어요. 남 경감과 전 경위 둘 중 한 명일 거라는 예감이 왔어요. 달려가서 살펴보니 남 경감이었어요. 불에 타서 형체를 반밖에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어요. 불과 20분전까지만 해도 같이 지구대에 앉아있던 사람인데….

―폐쇄회로(CC)TV 녹화 영상을 봤는지.

"폭발 장면이 담긴 CCTV는 차마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순찰차에 달려있던 블랙박스의 영상은 봤어요. 남 경감과 전 경위가 현장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었어요. 그게 마지막이었던 거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걸음이었죠…."

―사고 직후 어떤 일이 일어났나.

"저는 돌아가신 두 대원을 책임지고 있던 팀장이니까, 남 경감과 전 경위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비보를 전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어요. 남 경감의 아내는 울기만 하고, 전 경위의 아내는 나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너무 괴로웠어요. 차라리 내가 죽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사고 이후 어떤 경험을 했나.

"멍한 상태가 계속 됐어요. '쿵' 소리라도 나면 깜짝깜짝 놀랐고요. 동료들이 세상을 떠난 현장이 지구대에서 불과 300m가량밖에 떨어져있지 않았어요. 신고 출동을 나갈 때마다 지나야 하는 길이었어요. 그 때마다 고인들이 생각나서 숨이 막혔어요. 출퇴근할 때라도 그 곳을 지나지 않으려고 먼 길로 돌아왔어요."

―사고 현장은 평소 순찰 때 자주 지나다니던 곳이었나.

"사고 현장 인근에는 상습적으로 주민들이 불법 도박을 하는 건물이 있었어요. 얼마 전에도 판돈 460만 원을 걸고 도박하던 일당이 붙잡힌 곳이었고요. 그래서 경찰서에서도 유심히 챙겨보던 지역이라, 항상 순찰 코스에 들어가 있던 곳이었어요. 제가 만약 그 시각에 순찰을 나갔다면 폭발 시점에 그곳을 지나갔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사고를 당한 사람이 본인이 됐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네. 사고가 나기 직전 전 경위는 택시 기사를 폭행한 취객을 조사하고 있었어요. 경찰서 형사과에 넘기기 전에 초동 조사를 해서 상황보고서를 작성하는 절차예요. 그런데 취객이 2m가량 떨어진 소파에 앉아있는 택시기사에게 자꾸 다가서려 하는 것을 말리느라 전 경위의 순찰이 늦어졌어요. 만약 취객이 계속 난동을 부리고, 전 경위가 계속 지구대에 앉아있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됐다면 제가 대신 순찰을 나갔을 거예요.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제가 없었을 수도 있겠죠."

―그런 생각들을 하니 어떤 스트레스가 생겼나.

"잠이 오지 않았고, 애써 잠들더라도 금방 깨는 날이 많아졌어요. 낮과 밤을 착각한 나머지 휴일 저녁에 근무복을 챙겨 입다가 아내가 '오늘 출근하는 날이 아니지 않냐'면서 말린 적도 있어요. 잠을 못자니 평소 입에 안 대던 맥주도 한두 캔씩 하게 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면제로 처방 받아서 먹었어요. 집중도 잘 되지 않고 건망증이 늘었어요. 민원인을 조사하고 나서 사건 기록부를 펼치면 '잠깐, 내가 왜 이걸 폈지?'라고 한동안 멍하게 있는 때가 자주 생겼어요."

―사고 이후 가장 아쉬웠던 점은 뭔가.

"이렇게 동료가 순직하는 사건사고를 옆에서 목격한 직원들은 한 번 쯤은 심리 상담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상담 요원을 경찰서마다 배치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지방청 단위에는 뒀으면 좋겠어요. 상담을 받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허재윤 경사(46)


-경남사천경찰서 사천지구대 출신
-2010년 12월 강력팀 근무 중 수갑을 찬 범인을 놓쳐 추격하다가 다리 골절. 2012년에도 출동 중 교통사고로 입원.
-악몽을 가끔 꿈.
-2013년 12월 17일 오후 경남 진주시 자택 인근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어떤 사건이 있었나.

"2010년 12월 경찰서 강력팀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20대 절도 피의자를 구속하고 나서 수갑을 채우고 현장 검증에 데리고 다녔어요. 장물을 어디에 팔아넘겼는지 금은방을 돌아다니고 있었죠. 구속 수감 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빨리 사건을 마무리해서 검찰에 송치해야 했어요. 여죄가 많아서 급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죠. 그러다가 피의자가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고개 인근에서 '소변을 보고 싶다'며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수갑을 채워놨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그대로 달아났다. (경찰이) 방심한 거였죠. 피의자가 축대 아래로 뛰어내려서 저도 앞뒤 안 보고 따라 갔어요. 그런데 높이가 5m나 되는 축대였던 겁니다. 발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발이 말을 듣지를 않았어요. 그대로 피의자는 놓쳐버렸죠. 병원에 가보니 저는 양발 발가락뼈가 부러진 상태였어요.

―사건 당시 어떤 기분이 들었나.

"1초도 안 되는 추락 높이였지만 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런데 다친 것 때문에 괴로운 건 아니었어요. 수갑을 찬 피의자를 놓쳤다는 죄책감이 더 컸죠. 이틀 만에 동료 팀원들이 피의자를 다시 잡아들이긴 했지만 징계는 피할 수 없었어요. 제가 속해있었던 강력팀의 팀장은 다른 경찰서로 징계성 발령을 받았고, 저도 문책을 받았어요. 언론의 질타도 심했어요. 1, 2주 동안은 (그 사건과 관련된 뉴스가 나올까봐) 아예 TV도 신문도 볼 수 없었어요.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고요.

―사건 이후 또 한 번 부상을 당한 적이 있는지.

"2012년 8월이었어요. 그때도 강력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 절도 수배자가 모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올 것이라는 첩보가 접수됐어요. 경남 사천시 삼천포에서 이동해야 했어요. 빗길이었지만 시간을 지체하면 수배자가 도망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운전대를 잡은 동료 팀원이 속력을 많이 높였어요. 그런데 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사고가 났어요. 조수석에 타고 있던 저는 오른쪽 어깨뼈가 골절됐어요."

―이번에도 신체보다는 정신적 고통이 심했나.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죄책감 때문에 괴로웠어요. 저는 그나마 부상을 입었다는 이유로 정상이 참작됐지만 함께 출동했던 동료 팀원들은 문책을 피할 수가 없었어요. 2년 전 일이 생각나면서 '나처럼 불운을 몰고 다니는 인간 때문에 동료들이 문책을 당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요. 저도 알아요,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거.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어떤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위에 눌렸어요. 꿈을 꾸면 피의자를 놓쳤던 사건 장면이 반복됐고요. 중간에 깨는 일도 많았고…. 이성적으로는 생각하면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전부 다 제 잘못은 아니었겠죠. 하지만 주변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혹시 나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 이후로는 수갑만 봐도 과거 사건이 생각나고요. 강력팀 형사가 수갑만 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제대로 일이 되겠습니까? 결국 2000년부터 줄곧 지켰던 강력팀 형사 자리를 떠나서 2013년 8월부터는 지구대 근무를 자원했어요."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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