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PTSS 군인 6명 인터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5일 19시 56분


코멘트
<군인>

●박모 씨(41)

-해군 중사로 전역.
-1999년 6월 15일 오전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발생한 '제1연평해전'에서 북한 함정과 교전.
-악몽과 함께 술을 마시면 환영 증세.
-2013년 12월 12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송파구 성동구치소에서 10분씩 4차례 접견.

▽일문일답

―술을 마시면 뭐가 보이나.

"'빨갱이'라고 하잖아요. 가끔 가다 술을 한 잔 마시면 그런 게 보여요. 특히 북한 관련 뉴스를 접하면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천안함 폭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에서 숨진 사람들 중에 제가 함께 근무했던 사람도 있거든요. 술 마시면 그 사람들 생각도 나고, 그립고 그래요. 옛날 함께 했던 시절들도 생각이 나고요. 평상시에는 괜찮아요."

―왜 술을 마셨나.

"제가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 중 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나라에서 제대로 보상도 안 해주고 다른 사람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질 않으니까 술로 해결을 했던 것 같아요."

―악몽도 꾸나.

"'제1연평해전' 직후랑 천안함 폭침 사건, 연평포 포격 사건 터졌을 때마다 악몽을 꿨어요. '제1연평해전' 당시로 돌아가 북한군들하고 교전을 하는 꿈을 꿔요. 제가 북한군을 향해 총도 쏘고…."

―어머니께서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자고 하셨는데 왜 끝까지 가보지 않았나.

"저는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보다 했죠. 술 마시면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은 줄 알았고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일도 해야 하잖아요. 만약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가 일하는 데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S)이라고 들어봤나.

"이번에 인터뷰 요청하러 왔을 때 처음 들었어요. 구치소 안에서 물어보니까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랑 증세가 비슷한 거 같기는 한데 모르겠어요."

―자살 시도는 몇 번이나 왜 했나?

"4번 했어요. 모르겠어요. 저 스스로 이겨낼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더라고요. 지난해 2월에도 아파트 8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뒤에서 허리를 붙잡고 말리셔서 뛰어내리지는 못했어요. 어머니께는 제가 할 말이…."

―집에 불 지른 건 기억이 나나.

"전혀 안 나요. 나중에 경찰서에서 앞에 앉은 형사한테 '불을 질렀다'는 말을 듣고 황당했어요. 저는 전혀 그런 기억이 없는데…. 어머니한테 '간첩 있다'고 말했다는 것도 기억이 안 나요. 그 날은 소주도 4병 밖에 안 마셨는데…. 평소에는 소주 5병 이상 마셔요."

―6번이나 굿을 했다고 들었다. 굿 하러 따라간 이유는.

"가면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하도 해보자고 하시니까….

―나오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볼 생각인가.

"네. 정신과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죠.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그 동안 헛고생 한 것도 억울하고요. 이제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아야죠. 어머님께도 잘 하고요."

●정의정 소령(43)

-해군 소령.
-2007년 11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유엔 평화유지군(PKO)으로 수단에서 근무. 2008년 7월 7일 오후 임무 수행 중 시장에 들렀다가 모여든 시민들 중 한 명에게 총격을 받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어지럽고 악몽을 반복적으로 꿈.
-2013년 12월 20일 경기 이천 국방어학원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사건 당시 상황은.

"2008년 7월 7일 오후 아프리카 수단 남북부군 군사 정전 요원 2명과 저를 포함한 유엔군 5명이 남부 지역으로 유엔 현시를 나갔어요. 유엔 현시는 '유엔은 여러분들에게 발을 끊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들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갔는데, 정전 요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가자고 시장에 들르자는 거예요. 전 가지 말자고 주장했죠. 5월부터 남부군과 북부군 사이의 교전이 심각해지면서 위험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계속 가지 말자고 하니까 자기들끼리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죠. 팀 단위로 움직여야 하거든요.

차를 세워두고 시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사람들 반응이 심상치 않았어요. 우리를 따라오면서 뭐라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통역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북부군 군사 정전 요원이 문제라는 거예요. 유엔군이 북부군 스파이를 남부에 데려왔다고 오해를 한 거예요. 그리고 몰려든 사람들 중 한 명이 북부군 군사 정전 요원을 뒤에서 치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바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죠."

―그러면 총격은 언제?

"차로 돌아오는데도 뒤에서 30, 4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계속 따라오더라고요. 그리고 저희가 차에 타니까 그 사람들이 차를 둘러쌌어요. 특히 북부군 군사 정전 요원이 탄 차를 막 흔들면서 차에서 내리라고 하더라고요. 차 옆 유리창과 뒤 유리창도 깨지고…. 안 되겠다 싶어서 관심을 제가 탄 차로 돌리려고 엔진회전수(RPM)를 끌어올려가면서 '부릉부릉' 소리를 냈어요. 사람들이 제가 탄 차 쪽으로 관심을 가지더라고요. 그 순간 북부군 군사 정전 요원이 타고 있던 차가 앞으로 조금 이동을 했어요. 근데 그 때 누군가가 AK47로 그 차에 총을 쏘기 시작했죠.

차 안에 타고 있던 북부군 군사 정전 요원은 어깨에 총상을 입었고, 차에 같이 타고 있던 유엔군 한 명은 머리에 총을 맞았어요. 창문 너머로 머리에 총을 맞은 친구가 눈만 끔뻑끔뻑거리고 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시뻘건 피도 흘러내리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무기력한 느낌과 함께 '아, 다음은 내 차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가족들 얼굴이 떠오르더라고요. 2초 사이에 10년 동안의 스토리가 주사를 맞으면 약물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지는 것처럼 머리로 쫘악 들어왔어요. 아내가 임신했던 모습, 딸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모습도 떠오르고…. 그러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살려면 저 사람을 죽이는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죠. 그래서 차로 총 쏘는 사람을 들이받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유엔군은 총을 안 들고 다닌다'며 총을 쏘고 있던 사람을 뒤에서 붙잡고 말려 총격이 그쳤어요. 그 때 제가 무전기로 '운전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다른 차량에서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빨리 도망가자'고 말하고 재빨리 운전을 해서 빠져나왔죠."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나.

"유엔 베이스로 돌아와서 부상자들을 치료했죠. 머리에 총상을 입은 친구는 그곳에서 치료를 할 수가 없어서 케냐 나이로비로 이송했어요. 어깨에 박힌 총알은 바로 빼냈고요.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둘 다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아직도 두 사람에게 미안해요. 제가 끝까지 우겨서 시장에는 안 갔어야 하는 건데….

그 날 저녁에 우간다 산 맥주를 마셨는데 '아 술이 이런 마력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이후 4달 더 현지에 머물면서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많이 폈어요. 담배는 하루에 2갑씩 피우고, 맥주도 매일 밤 500ml짜리 5캔 이상은 마셨던 것 같아요. 맥주가 떨어지면 초조하고 그랬어요. 기분이 나빠서 마셨어요. 그 이후에도 계속 임무 나가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짐승들이 뜯어먹는 시체들도 보고 그랬거든요. 죽음이랑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죠."

―사건 이후 달라진 것은.

"전 뭐가 변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하루는 아내가 제가 자다가 너무 크게 움찔한다고 말을 해주더라고요. 수단에 다녀온 이후로 아내가 깰 정도로 제가 반복적으로 계속 움찔 움찔한다는 거예요. 아내 말이 요즘에도 가끔 그런대요. 아내가 이야기를 해줘서 그런가보다 하지 저는 제가 자면서 움찔움찔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건 악몽을 반복적으로 꾼다는 거예요. 어떤 꿈이냐면 제가 어두운 곳에 혼자 있는데 검은 그림자들이 꿈틀꿈틀 거리면서 계속 제게 몰려와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저는 그 그림자들을 제가 할 줄 아는 걸로 물리치죠. 활도 쏘고, 태극권도 사용하고 해서…. 그런데 늘 마지막 순간에는 저 멀리 있는 저격수가 제게 총을 쏴요. 제가 그 총에 맞아서 '으으'하고 있으면 아내가 절 흔들어 깨우죠. 일어나보면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어요."

―또 다른 건.

"처음에는 마트를 잘 못 갔어요.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빙글의자에 앉아 몇 바퀴 돌고 일어난 것처럼 어지러웠어요. 시장에서의 경험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은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쁘고, 저를 둘러싸거나 제게 주목하는 게 싫어요. 그래서 귀국한지 얼마 안 됐을 때에는 아내가 마트 가자고 하면 가기 싫다고 하고 안 갔어요. 요즘은 같이 마트도 가고 하죠. 옆에 아내가 있으면 안심이 돼요.

―주변 사람들에게 사건 경험을 이야기하나.

"아내에게도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요. 저만 가지고 있는 경험이에요.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할 필요도 없죠.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것도 저 밖에 없고요.

솔직히 지금 옆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보다 그 때 수단에서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이 더 편해요. 그 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 중에 독일 육군 소속 하인츠라는 친구가 있어요. 하인츠랑은 페이스북 통해서 계속 연락을 주고받아요. 그 때 이야기를 안 해도 하인츠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안도감이 들어요."

―그래도 잘 견뎌내고 계신 것 같은데.

"'내가 왜 이럴까' 스스로 물어봤죠. 그리고 2010년 우연히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미군 참전용사들이 귀국 해 겪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다룬 책 '다운 레인지'를 접하게 됐어요. 그걸 보면서 PTSS를 알게 됐죠. 이후 2012년 9월 국방부의 국방정책연구과제로 해외파병자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관리 방안 연구를 제안했어요. 이게 채택돼 용역 연구를 제가 해 보고서까지 제출했죠.

요즘은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한 시간씩 명상을 한해요. 명상을 하다 보니 제가 느끼는 불안감, 무기력감 등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게 큰 도움이 됐어요. 아직까지 일상생활에서서 받는 스트레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상을 하면서 많이 나아졌어요."

●박모 씨(63)

-육군 하사로 전역.
-1969년 5월 13일부터 1972년 5월 31일까지 군 첩보부대인 국군 제9965부대(국군정보사령부) 예하 903부대(일명 '설악개발단')에서 복무. 전역 후 1000만 원을 지급하고 좋은 직장을 소개시켜 준다는 말을 듣고 북파공작원 양성을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에 속아 입대해 혹독한 훈련을 받음.
-이상행동, 성격변화.
-2013년 12월 14일 전북의 자택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어떻게 '설악개발단'에 가게 됐나.

"17살 때쯤 쌀 10가마니 값을 가지고 부산으로 도망을 갔어요. 당시 부모님이 쌀 장사를 하셨거든요. 그런데 부산에 가서 보니까 중졸 학력으로는 취업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부산진역 앞에서 구두닦이를 했죠. 구두닦이하면서 열차 암표도 팔고요. 당시 610원짜리 표가 방학이 되면 1300원까지 올랐어요. 암표 팔다가 단속에 걸려 유치장도 다녀오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구두를 닦고 있는데 사람들이 '누가 군에 갈 사람을 모집하는 데 조건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사람 모집하는 곳에 가봤더니 '미군 기지에서 훈련을 받고 복무하다가 제대하면 1000만 원을 주고, 평생 취직도 시켜준다'고 하지 뭐예요. 그래서 바로 지원을 했죠.

―그래서 바로 '설악개발단'에 갔나.

"지원을 하고 나서 부모님께 자랑한다고 집에 갔어요. 부모님께 상황 설명을 하니까 죽으러 가는 줄 알고 어머님은 바지가랑이 잡고 가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자식이 저거 하나뿐이냐'고 화를 내시면서 방문 닫고 들어가 버리시고요. 그런데 그 때는 부모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어요. 어머니께서 큰길까지 따라 나오시면서 가지 말라고 붙잡으시는데도 뿌리치고 신나서 집을 떠났죠.

그리고 다시 부산 가서 같이 입대할 사람들이랑 서울 가는 기차를 탔어요. 저를 포함해 스무 명 되는 남자들이 완행열차 한 칸에 타고 갔어요. 그 때 보안대 헌병대 애들이 앞뒤 문을 다 막고 일반인들은 출입도 못 하게 하더라고요. 그리고 영등포에서 내려서 머리를 깎고, 다시 강릉인지 어딘지 모르겠는데 어딘가에서 내려 트럭을 타고 또 한참을 산 속으로 들어갔죠. 그렇게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들어갔더니 천막이 쳐져 있는 곳이 나오더라고요. 그 천막에 저희를 집어넣더니 훈련이라면서 천막에서 살라고 하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북파공작원 양성부대더라고요. 그 때가 18살이었어요."

―어떤 훈련을 받았나.

"일반적인 훈련은 빼고, 외줄타기를 하는 게 있었어요. 일반 부대에서 외줄타기를 하면 안전고리를 걸고 하잖아요. 그런데 안전고리가 없어요. 밑은 온통 뾰족 바위들뿐인데 뜀뛰기 몇 번 시키거니 안전고리 없이 건너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친구 하나는 서서 오줌을 싸 버리기도 하고…. 2미터 넘는 원목을 지고 계곡을 올라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훈련을 받으면서도 항상 긴장되고 불안했죠. 언제 뽑혀 북으로 넘어갈지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차라리 죽는 게 행복했어요. 오죽 하면 같이 훈련받던 동료 하나는 훈련 받기 싫어서 자기 다리에다가 총을 쏴버려겠어요."

―제대는 어떻게 하게 됐나.

"원래는 '말뚝' 박으라고 해서 반강제로 서류에 도장까지 찍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팀장이 절 부르더니 '너 여기 생활 더 할래, 안 할래'라고 묻더라고요. 제가 '더는 못하겠다'고 하니까 '알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37개월 만에 세상에 다시 나왔어요.

제대하는 날까지 저한테 사기를 쳤어요. 집에 가면 경찰서장이랑 시장이 마중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꿈에 부풀어서 제대를 했죠. 이제 돈만 받으면 제대로 살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제대 신고 하러 갔더니 '거기 다녀왔다는 소리 하지 말아라, 국가비밀이니까 입만 벙긋하면 잡아간다'고 하더라고요. 제대한 이후에도 몇 달 동안은 설마 설마 하면서 기다렸는데…. 결국 사기였더라고요."

―제대 이후는 어떻게 살았나.

"10년 넘게 방황을 했어요. 술만 마시면 이상해요. 정신이상자가 따로 없는 거예요. 술 마시고 파출소 가서 발가벗고 경찰관들이랑 싸움도 하고 그랬어요. 그게 사람이 할 짓이에요? 그리고 한 번은 1.4t짜리 중고차 탑차를 가지고 장사를 할 때였는데요. 한 여름에 파출소 앞에 탑차를 세워놓고 차 밑에 들어가서 자고 나온 적도 있었어요. 차는 시동을 걸어놓은 채로…. 차 안에 그 날 번 돈이며 다 넣어놨었는데 아침에 보니까 누가 다 가져가 버렸더라고요. 그런 생활을 한도 끝도 없이 반복했죠.

제대 한 후에 아버지가 공장에도 취직을 시켜주셨는데 한 달 다니면 많이 다니는 거였어요.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어요. 누군가가 말만 조금 삐딱하게 하면 '여기 안 다니면 될 거 아니냐'라고 싸움하고 때려치우곤 했죠."

―왜 술을 마셨나.

"생각하다 보면 화가 나요. 제대하면 취직도 시켜주고 돈도 준다고 했던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안 해줬어요. 약속은 지켜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울화통이 터져요. 제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싶은 거죠. 약속을 지켜주면 제가 이 고생은 안 했을 텐데…. 제가 언제 뽑혀 북으로 넘어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마음을 다잡은 계기는.

"한 10년 넘게 방황을 하다가 하루는 제가 술에 취해 작은 딸을 허리띠로 때리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큰 딸이 절 막다가 이빨이 부러졌어요. 그 일을 겪고 나서 이러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제대로 살려고 마음을 먹었어요."

―PTSS에 대해서는 들어봤나.

"특수임무수행자 보상 절차를 거치면서 알게 됐어요. 그 때는 제가 '군부대에서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채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훈련을 받았고 상관으로부터 욕설과 폭행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그로 인해 전역 후 치아 질환, 난청 증상, 허리 장애, PTSS, 가정과 사회생활 부적응 문제 등을 겪었다'고 주장했죠. 육체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피해에 대해서도 당연히 나라가 배상을 해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최성재 씨(가명·33)

-해군 병장으로 전역.

-2002년 6월 29일 오전 서해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발생한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 함정과 교전. 당시 병장.

-자주 악몽을 꾸고 귀신을 보는 환영 증상. 집중력 저하.

-2013년 12월 17일 자택 앞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사건 당시 상황은.

"첫 기억이 갑판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이에요. 우리 배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연기가 걷히면서 갑판 바닥에 뭔가가 흘러내리는 거예요. 처음엔 바닷물인 줄 알았죠. 파도가 세게 칠 때는 파도가 머리 위까지 올라와 바닷물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그런데 그 날은 햇볕도 쨍쨍하고 바다도 잠잠했어요. '바닷물일 리가 없는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어요. 피였어요. 그 순간 잠시 멍해지더라고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대처는 다 했지만 그 모습이 뇌리에 박혀 있어요."

―또 다른 모습들은.

"쓰러져 있는 동료들의 모습…. 포탄 파편을 너무 많이 맞아 쓰러져 있는 동료를 누군가가 붙잡고 계속 인공호흡을 하는데 이미 숨은 넘어가고 있고….

최근 심리상담을 2번 정도 받았는데, 상담사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보통 그 당시 일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뭐가 빵 터지고, 이렇게 저렇게 됐다'고 말을 하는데 저는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전 당시 상황들보다는 피가 흘러내리던 모습,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상황들 위주로 생각이 많이 나요."

―사건 이후 달라진 것은.

"사건 직후 약 2년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자면 악몽도 꾸고, 가위도 놀리고…. 자다 깨면 천장에서 귀신도 보이고요.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소름 끼치는 말도 안 되는 장면들이 보이고 그랬어요. 그래서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요.

한 번은 꿈을 꿨는데 내 방 창문을 열었더니 창문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뒤로 기둥이 하나 서 있고 그 기둥 위에 평평한 평지가 놓여 있더라고요. 평지 위에는 허수아비 하나가 매달려 있고요. 그 순간 천둥번개가 치고 잠깐 눈을 깜빡였는데 그 모든 게 사라진 거예요. '어디 갔지' 이러고 있는데 뭔가가 확 지나가더라고요.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잠에서 깼어요. 지금 생각해도 섬뜩해요."

―또 다른 것은.

"사회생활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어느 순간 집중력이 탁 틀어지는 거예요. 회사에서 아침 조회를 하는데 조회가 끝나면 '아까 뭐라고 이야기한 거야?'라고 동료들에게 자주 물어봐요. 그러면 동료들은 '에이, 또 집중 안 했네'라고 타박하죠. 스스로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건데….

그래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 지레 겁부터 먹어요. 보통 일을 가르쳐 주면 1에서부터 10까지는 다 기억 못 하더라도 1에서 9까지는 알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전 1에서 7정도 밖에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잘못해서 일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부터 되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 무너지는 거예요. 주변에서도 '쟤는 이 일이랑 안 맞는 것 같다'라고 뒷담화를 하는 게 제 귀에도 들려오고요.

'제2연평해전' 겪기 전만 해도 가족이나 친구들 휴대전화 번호 30개씩은 외우고 다녔는데, 이후에는 서너 개도 외우기가 힘들더라고요."

―1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힘이 드나.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말해요. 하지만 괜찮아졌다는 건 외적으로 봤을 때만 그런 거예요. 속마음은 아무도 모르잖아요. 제가 봤을 때는 늘 마음 한 구석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있어요. 문득 문득 욱 하는 게 있어요. 결혼하고 나서 아내가 계속 하는 말이 '전투적'이라는 거예요. 제가 잘못한 건데도, 별 것도 아닌 일인데도, 자꾸 싸우려 든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아들도 태어나고 해서 욱 하는 것들이 전에 비해서 좀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겨내기 위해 정신과 진료도 받아보고 이것저것 많이 해봤지만, 결국은 저 스스로 이겨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도 가족 때문에 버티고 있는 거죠."

―정신과 치료는 왜 도움이 안 됐나.

"들어주는 척 하면서 '아, 그러시냐, 알겠습니다' 하고 약만 처방해줘요. 몇 번을 가도 그런 식이에요. 약만 처방해주는 사람들 같아요. 그런데 약을 먹으면 멍해져요. 바보가 되는 것 같아요. '뽕'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약을 먹으면 '뽕' 맞은 것 같아요. 몸이 추욱 늘어지죠. '추욱 쳐지게 만들어서 나쁜 생각을 할 틈을 안 주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그 분들이 해주는 말을 저 스스로 또 해석을 해요. '이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밖에 안 해주겠다'라고 판단을 해버리니까 상담을 받아도 효과가 있을까 싶은 거죠."

―의사나 상담사가 날 이해 못해준다는 생각이 드는 건가.

"네. 의사나 상담사뿐만 아니라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날 이해 못한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그들은 경험이 없잖아요. 공감하지 못한다는 걸 느껴요. 제가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면 '아, 힘들었겠다' 뿐이에요. 제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지 않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도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아요.

아이러니하지만 저는 매년 6월을 기다려요. 마음 아픈 일을 겪고 힘들어하기 시작한 달이기도 하지만 그 아픈 기억들을 공유하고 버티게 해주는 사람들과 1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것도 6월이거든요. 매년 6월 29일이 되면 전우들을 만나게 되는데 '진정으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 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제 이야기에 '맞다, 나도 그렇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 밖에 없기 때문이죠.

―나라에서 해준 것은.

"2,3년 전쯤에 국가보훈처였는지 보훈병원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는데 전화가 와서 'PTSS 치료를 해주겠다'고 했어요. 고마웠죠. 그런데 '치료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었더니 '서울까지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주말은 안 되고 평일에 와야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어요. 제가 '일도 하고 먹고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냐'고 되물었더니 '그것까지는 저희가 어떻게 해드릴 수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죠. 그러면 지방에 살거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치료를 받으라는 건지…."

―'그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도 드나.

"가끔 하죠. '제2연평해전'을 겪지 않았더라면 지금 제가 뭘 하고 있을까, 이것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물론 지금보다 더 못한 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문득 문득 궁금해요.

그리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최면 치료를 받아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받았어요. 최면을 걸어서 '사건과 관련된 기억은 사라진다, 기억력도 좋아지고, 멍해지지도 않고 잘 산다' 이렇게 암시를 걸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죠.

최근에는 공부를 더 해서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상담하는 일을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2연평해전'을 겪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도 잘 다독여주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잘 들어줬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는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내 마음이 편하질 않아서 그런지…. 상담을 하려면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도 마쳐야 한다고 해서 자신은 없지만, 기회가 되면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어요."

●김모 씨(26)

-해군 병장으로 전역.
-2010년 3월 26일 오후 백령도 남서쪽 2.5㎞지점(추정)에서 서해 경비 임무를 수행하다 북한 잠수정의 기습적인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한 천안함에서 생존. 당시 상병.
-욱 하는 것이 심해지고 노이로제 걸린 말도 생김.
-2013년 12월 15일 서울 중구의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사건 당시 상황은.

"당시 경비 임무 중이었어요. 특이점도 없었고요. 오후 8시부터 당직 근무였는데 갑자기 '꽝' 소리가 나더니 배 안에 불이 다 꺼지더라고요. 장비에 깔려 다친 사람들 몸에 줄을 묶어 갑판 위로 올려 보내고 그랬어요. 바로 물이 새나 확인을 했었는데 물은 안 새더라고요. 빨간색 비상전등 아래서 다들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어요. 배 위에 올라가서는 계속 인원 확인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한 20~30분 정도 기다렸더니 구조대가 오더라고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당연하죠. 갑판 위에 올라오고 나서 제일 먼저 '담배 피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저 같은 경우는 사고 당시는 그렇게 큰 스트레스를 겪지 않았어요. 제일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때는 돌아가신 분들 영결식하고 장례식 때였어요. 다들 그럴 거 같아요. 영결식 할 때 저보다 2달 먼저 들어온 선임 영정을 들었는데…. 나만 살아남아 죄송하다기보다는 '다 같이 살았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제 선임뿐만 아니라 당시 천안함에 있던 분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배를 오래 타다 보면 다 알죠. 그 때 돌아가신 46명 모두를 아니까….

저는 그런 걸 겪지는 못했는데 생존 장병 중 한 명은 현충원에서 유족들을 만나 '니가 무슨 낯으로 여길 오냐'는 말도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위축이 됐어요.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맞다, 저 분들에게는 우리가 나쁜 놈들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건 직후 군에서 PTSS 관련 교육이나 상담을 받았나.

"영결식 끝난 다음에 다 같이 진해에 있는 해군 충무공리더십센터에 갔어요. 그곳에서 PTSS 교육을 받았어요. 교육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그저 PTSS가 뭐고, 어떤 식으로 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말들을 들었던 것 같아요. 그 교육은 전혀 도움이 안 됐어요. 단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생존 장병들과 같이 지낸다는 것이 심리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딱히 서로 무슨 말을 하거나 이런 건 아니었는데….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은 있나.

"사건 이후 다시는 배를 타고 싶지 않아 육상근무를 지원해 다른 부대에서 복무할 때 2번 정도 받았어요. 그 때는 '다 괜찮다'고 말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나중에 어떤 피해가 돌아올지 몰라서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한 거죠. 잠자기 힘들어도 잘 자는 척 하고, 밥이 안 먹혀도 잘 먹는 척 하고…. 군의관이나 의사들은 '밥 잘 먹냐, 잠은 잘 자냐'라고 물어요. 그런데 '잘 먹는다, 잘 잔다' 이렇게 답하면 괜찮은 줄 알아요. 저는 심리치료사나 상담사한테도 한 번도 '힘들다'고 말해본 적이 없어요. '이 사람들에게 말해서 뭐하나' 그런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당시에 너무 힘들어서 편협해진 부분도 있는 것 같고요."

―왜 '말해서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나.

"이야기를 해줘도 이해를 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사건 직후 병원에 있을 때 사건 조사하러 나온 헌병들이 있었는데 다들 육군 출신이라 그런지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해줘도 이해를 못 했어요. 그 사람들도 이해를 못 하는데 군의관이나 다른 사람들은 알아줄까 싶은 거였죠.
그리고 그 때 느꼈던 감정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비행기 사고가 났는데 다른 승객들은 다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사람 정도 돼야 말이 통할까…."

―사건 이후 달라진 것은.

"이후에 성질이 좀 더러워진 것 같아요. 꼭 그 사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갑자기 욱 하는 것들이 심했어요. 별 것도 아닌 일에 욱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더라고요. 사건 직후 밤에 잠을 못 자는 경우도 가끔 있었고요.

노이로제 걸린 말도 있어요. 어머니께서 교회를 다니셔서 '한 번 주어진 삶'이라는 말을 많이 쓰시는데, 그 말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들도 '한 번 사는 인생' 이런 말 자주 쓰잖아요.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나요. 저한테는 해당 되지 않는 말이라서…. 저한테는 두 번째 삶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천안함 이야기를 하나.

"가족들한테는 안 해요. 학교 사람들한테도 많이는 안 하는 편이고요. 굳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이유는 없잖아요. 또 가까운 사람들은 제가 불편할까봐 이야기를 안 꺼내더라고요. 그렇게 배려해주면 고마워요."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인가.

"사건이 일어났던 3월이 되면 그 때 기억이 다시 살아나요.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그리움도 더 커지고, 그 때 느꼈던 슬픔들이 다시 떠올라요.

조금씩 잊어간다는 생각이 들 때도 힘들어요. 가족들은 절 걱정해서 '생존 장병들 안 만났으면 좋겠다' '잊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요. 하지만 제가 조금씩 잊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저 스스로가 미워요. '이거 밖에 기억을 못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고….

아, 그리고 제가 생활하는 것 보면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가끔 '야, 그 때 어땠냐'면서 가볍게 물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누가 만약 '너 죽었다 살아났는데 기분이 어때?'라고 가볍게 물어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쓸데없이 동정해주는 것도 싫어요.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쟤, 천안함 생존 장병이다. 잘해줘야겠다'라는 소리를 해요. '아이고, 안 됐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그러면 짜증이 나요."

―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산 사람은 살아야 되잖아요. 그리고 살아야 한다면 먼저 가신 분들 몫까지 잘 살아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학교라는 돌아올 곳도 있었고요. 복학한 이후에 사람 만나는 데 엄청 힘을 쏟았어요. 지금은 옆에 있지만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니 주변 사람들에게 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잘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들이 천안함에 대해 잊어가는 건 당연하겠죠. 그런데 어차피 잊어갈 거라면 폄하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돌아가신 분들 개죽음 취급은 안 했으면…. 살아있는 사람들은 패잔병 취급 하더라도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나라를 지키다 숨졌다라는 인식 정도는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모 씨(24)

-해군 병장으로 전역.
-2010년 3월 26일 오후 백령도 남서쪽 2.5㎞지점(추정)에서 서해 경비 임무를 수행하다 북한 잠수정의 기습적인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한 천안함에서 생존. 당시 이병.
-불이 꺼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함. 죄책감에 시달림.
-2013년 12월 17일 대전의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사건 당시 상황은.

"그 날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당직이었어요. 당직을 마치고 오후 8시 반쯤 야식을 먹고 화장실 청소를 한 다음 샤워를 했죠. 샤워를 시작한 지 한 10분 정도 지났는데 갑자기 배가 엄청 큰 파도에 부딪혀 흔들리는 것 같더니 '꽝'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기울더라고요. 제 몸도 배 벽에 가서 부딪혔죠. 순간 불도 다 꺼지고, 아무 것도 안 보였어요.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어요.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야' 이런 말들이 들려오고 함교에서부터 '빨리 빨리 갑판 위로 올라오라'는 말이 전달돼 왔어요.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안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눈이 어둠에 적응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머리 위에 달려 있는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요. 캄캄하더라고요. 그 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어요.

아무 것도 안 입고 있는 저를 위해서 선임 한 명이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가져다 줬어요. 배 안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는데도…. 그 때 선임이 가져다 준 구두랑 근무복 바지, 체육복 티셔츠는 아직도 집에 가지고 있어요."

―큰 일이 터졌다는 건 언제부터 인식했나.

"배를 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그래서 항해하다가 배가 옆으로 기울었으니까 다시 배를 제대로 세우면 되는 줄 알았어요. 중사님한테 '이런 일이 자주 있냐'고 여쭤봤죠. 그런데 중사님께서 '무슨 소리냐, 군 생활 10년 한 나도 처음 겪는 일'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때부터 '큰일이 터지긴 터졌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불안해지더라고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때 이병이라는 이유로 다른 분들께 짐만 된 것 같아 아직도 죄송해요.

갑판 위에서 번호를 불렀는데, 모두 104명이어야 하는데 마지막 번호가 58번이었어요. 몇 번을 다시 해도 58번이 끝이었죠. 누군가가 '58번이 끝이다. 더 없다'고 말하는 순간 섬뜩하더라고요. 그 때 '내가 여기서 죽었을 수도 있었겠다' '정말 운이 좋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는 무척 혼란스러웠어요. 제가 살아남은 건 기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장난도 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없다고 하니까…. 지금도 가끔 그 분들 생각이 나요."

―사건 직후에 힘들었던 것은.

"사건 이후 약 한 달 동안 모든 뉴스가 천안함 관련 내용뿐이었어요. 그런데 뉴스에서 '북한이 어떻게 하고 있다' 이런 말들이 나오면 불안해지더라고요. 이런 일이 조만간 또 생기면 그 때는 어떻게 될까….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고, 그러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많이 힘들었어요. 천안함에서 살아 돌아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매일 저녁때만 되면 합동참모본부에서 나온 조사단이 와서 진술서를 한 장씩 쓰라고 했어요. 진술서는 범죄자들이나 쓰는 거잖아요. 물론 사건의 정확한 진실을 알아내야 되고 여러 사람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사건 발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계속 진술서를 쓰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그 날 있었던 일들을 1시간대별로 기록하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다시 15분 단위로 기록하라고 하고, 또 다시 10분 단위로 기록하라고 하고 그랬어요. 잘못한 사람 혼내듯이 계속 자세히 설명하라고 하면서요.

그런데 조사하러 나온 헌병대 중에는 육군이 더 많아서 저희가 이야기를 해도 이해를 못 했어요. 배의 구조도 모르니까 처음부터 함미가 어디고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일일이 다 설명을 해야 했죠. 한참 힘들 때여서 더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선임들 중에는 '왜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람을 보내냐'며 화낸 사람도 있었어요. 그 때 정말 힘들었어요.

다시 부대로 돌아간 뒤에는 안치소에 남겨진 관을 다른 부대에 반납하는 일까지 해야 했어요."

―군에 있을 때 정신과 진료를 받아봤나.

"2010년 12월쯤 경기 성남에 있는 국군수도병원에 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힘든 부분들을 이야기를 했더니 의사가 별로 해주는 것도 없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예, 그럴 수도 있죠'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응응' 이런 식의 답변만 돌아오고, 벽에다가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잘 안 갔어요.

그리고 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간다고 하면 간부들이 탐탁치 않아 하는 분위기였어요. 직접적으로 가지 말라는 이야기는 안 하는데, 제가 간다고 하면 위아래로 절 훑어보면서 '그래, 갔다 와'라고 말하더라고요. 간부들 입장에서는 한 명이 빠지면 일하기가 곤란하잖아요. 더군다나 그 분들이 볼 때는 제가 군 생활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가도 별 내용도 없고, 갈 때마다 눈치 보이고 마음이 불편해서 결국 몇 주 가다가 말았어요."

―사건 이후 달라진 것은.

"2010년 5월에 첫 휴가를 나왔어요.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서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날따라 비가 엄청 많이 왔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정전이 되면서 호프집에 불이 다 꺼졌어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 때(천안함) 생각이 스쳐지나가더라고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어요. 친구들에게 빨리 나가자고 말했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더라고요. 친구들도 깜짝 놀라고, 저도 놀랐어요. 제가 그럴 줄은 몰랐거든요. 그 때 불이 한 15분 정도 꺼져 있다가 다시 켜졌는데, 불이 꺼진 15분 동안 계속 그랬어요. 불이 들어오고 5분 정도 지나니까 다시 괜찮아지더라고요.

그 후로 제가 제일 싫어하는 장난이 화장실에서 볼 일 보고 있는데 불 끄는 거예요. 친구가 한 번 정도 그런 장난을 쳤는데 그걸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불이 꺼지는 게 너무 싫었어요. 뭔가 터지는 소리, 큰 소리에도 민감해요.

또 그런 생각도 했어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내가 여기서 사고가 나면 어디로 빠져나가는 게 가장 빠르지?' '이쪽으로 버스가 넘어지면 저쪽 창문을 열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런 생각들 안 하지만…."

―또 다른 것은.

"요새 북한 관련 뉴스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북한 뉴스를 볼 때마다 화가 나고 답답해요. '언제 한 번 다 뭉개버려야 되는데'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이 가끔 답답해요. '내가 왜 그런 상황을 겪어서 날 힘들게 하나, 그냥 남들처럼 무난히 전역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전 나름대로 적응을 잘 한 거 같아요. 천안함은 제가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부분도 있어요. 먼저 간 동기 어머니께서도 저한테 더 열심히 살라고 말씀해주시고, 저도 어머니한테 그 동기 몫까지 더 잘 살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런 약속이 있으니까 전 어긋나면 안 돼요.

가끔 꿈을 꿔요. 천안함을 타고 나가는 꿈인데 꿈에서는 아무 일도 없이 다 같이 돌아와요. 배 안에서 동기, 선후임들과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요. 제가 바라는 걸 꿈으로 꾸나보다 싶죠."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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