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문학 숲, 논술 꽃]선택은 무엇이 결정할까

  • 입력 2008년 4월 7일 02시 50분


‘광장’의 명준은 왜 남북 아닌 중립국행을 택했을까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짝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동무의 부모는 어디 살고 있소?”

“중립국.”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인 몸의 길, 마음의 길, 무리의 길, 대일 언덕 없는 난파꾼은 항구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물결 따라 나선다. 환상의 술에 취해 보지 못한 섬에 닿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섬에서 환상 없는 사람을 살기 위해서, 무서운 것을 너무 빨리 본 탓으로 지쳐빠진 몸이, 자연의 수명을 다하기를 기다리면서 쉬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결정한, 중립국 행이었다.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 대도 어깨 한 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하략)

[최인훈, ‘광장’]

최인훈의 ’광장’은 수능이나 논술고사에 가장 많이 출제된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다. 196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남북 이데올로기의 허상과 그 가운데서 이상적 삶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치안당국 취조실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월북하여 공산당의 간부가 된다. 그는 국립극장 무용수인 은혜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지만 남북의 혼란한 정국 때문에 두 사람의 인연은 오래 가지 못한다. 6·25전쟁이 터지자, 명준은 인민군 신분으로 서울에 내려와 자신의 친구인 태식과 결혼한 옛 애인 윤애를 만나 그녀를 농락하려다 그만두고 포로로 잡힌 태식과 그녀를 풀어준다.

그 후 낙동강 전선으로 나간 명준은 간호원이 된 은혜와 재회하여 사랑을 맹세하지만 은혜는 명준의 아이를 임신한 채 죽고 만다. 포로가 된 명준은 휴전 후,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제3의 중립국을 선택하지만, 중립국에 도착하기 직전 배에서 뛰어 내려 자살하고 만다.

’광장’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고뇌하던 한 젊은이가 자살로서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이 소설은 인간이 왜 사회를 만들고 살아가며 그 안에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왜 생겨나고, 그 이념으로 인한 갈등이 왜 발생하는지를 묻는다. 이런 주제가 집약적으로 드러난 대목이 바로 남북의 대표들 앞에서 명준이 중립국을 택하는 장면이다.

2008년 한국외국어대 정시논술 고사에서도 바로 이 대목이 제시문으로 출제되었다. 다만, 개인의 선택과 환경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작품을 읽어낼 것을 요구해 다른 문제와는 색다른 점이 돋보였다.

인간은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서 선택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이 처한 환경은 그 선택의 폭을 규정한다. 예컨대, 명준의 경우,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후 남과 북 그리고 중립국이라는 세 가지 선택이 환경으로 주어졌다. 명준은 주어진 세 가지 선택지 내에서 자신의 가치 판단에 따라 중립국을 선택한 것이다.

개인의 선택의 기준이 되는 가치판단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여러 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때 그 선택의 기준은 일반적, 공통적이지 않고 각자의 이성적 판단이나 주관적 가치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이나 주어진 환경에 맞춰 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며, ‘참’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달라지게 된다. ‘광장’에서 명준이 생각하는 중립국과 공산군 장교가 생각하는 중립국은 그 판단의 기준이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명준은 중립국이 남한이나 북한과 다른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광장이라고 생각했고, 공산군 장교는 중립국 역시 자본주의 국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이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라는 가정하에서 인간의 행위는 선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행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택에 작용한 가치관 또는 판단기준이 무엇인지 헤아려야 한다. 또한 주어진 환경―가령, 사회적 가치관이나 시대 상황―이 그 선택에 미친 영향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문학작품을 읽어 내는 데 필요한 능력 중 하나다. 논술고사에서 출제되는 문학 작품에 대한 해석은 심층적인 사고를 요구하므로 이와 같은 안목을 갖춰야 효과적인 논제 해결이 가능하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