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역사에서 논술의 길 찾기]링컨의 노예해방

  • 입력 2008년 1월 28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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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노예 해방. 인류애의 실현인가,정치적 수단인가? 링컨은 노예 해방자인가?

링컨은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으로 400만명이나 되는 흑인 노예에게 자유의 기쁨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들으면 자유와 평등을 떠올린다.

그런 면에서 그는 노예 해방을 실현한 박애주의자, 미국을 분열의 위기에서 구한 통합주의자다.

하지만 남북 전쟁 중에 선언된 링컨의 노예 해방이 단순히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링컨은 미연방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면 노예 제도가 계속 유지된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주(州)의 권한을 파괴하고 미국을 패권주의로 몰고 간 호전적인 정치가이다. 과연 링컨의 노예 해방은 인류애의 실천인가, 아니면 정치적 수단에 불과했던 것인가?

먼저 링컨의 위대한 업적이며 인류애의 실천으로 알려진 노예 해방의 과정을 살펴보자. 링컨은 남북 전쟁 중에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남북 전쟁의 여러 가지 원인 중 노예 문제를 강조한다. 1841년, 오하이오 강을 따라 남쪽의 면화 생산 지역을 순회하던 링컨은 노예들이 혹사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주인도 되고 싶지 않다”, “절반은 노예, 그 절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이 관계가 영속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타인의 자유를 부인하는 자는 그 자신도 자유를 누릴 가치가 없다”.

노예 폐지 운동은 초기에는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북부에서조차 노예 폐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박해와 공격을 받았다. 일례로 1837년 일리노이 주 올턴에서 노예제를 반대한 편집인 엘리자 러브조이가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을 들 수 있다. 노예 폐지 운동이 활력을 얻기까지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새로운 서부 개척지에 노예 제도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논란거리가 됐다. 한편, 1850년 시행된 도망노예송환법(Fugitive Slave Law)에 의해 벌어진 잔인한 노예 사냥에 대한 혐오감이 조성되었다. 결정적으로 스토우 부인의 노예제를 반대하는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 1852)’은 널리 감정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노예 제도의 비인간성과 잔혹성을 고발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남부에서는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북부에서는 여덟 가정에 한 권꼴로 팔렸다. 이 책에서 스토는 노예 소유주 개인은 용서하되 노예 제도는 철폐하자는 이중적 접근 태도를 취함으로써 노예제 폐지라는 대의에 최대한의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전쟁 중 스토 부인과 링컨의 만남이 노예 해방을 앞당기는 데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일어난 남북 전쟁은 연방의 존속 여부를 둘러싼 지역 간의 권력 투쟁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약 400만 명의 노예가 해방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인류애의 실천으로 알려진 노예 해방의 과정이다.

이제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것은 인류애의 실천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시각을 살펴보자. 그 당시 남북이 처한 경제적 수준 차이를 살펴보면, 남북 전쟁의 근본적인 발생 원인은 노예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아니라는 사실이 쉽게 드러난다. 산업 중심의 북부는 성장하는 상공업을 위해서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의 공급이 절실했다. 반면, 농업 중심의 남부는 원료를 생산하는 농업에 종사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지역 간 경제 구조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의견 대립은 결국 노동력이 되는 노예 문제와 얽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링컨의 가장 큰 업적은 노예 해방 그 자체가 아니라, 남북 전쟁의 승리에 따라, 노예 해방이라는 명분하에 남부에서 농업 노동력으로 종사하던 흑인들을 공장 노동력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공업 대국 미국이라는 발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북부 출신의 링컨이 신경 쓴 것은 걸음마 단계였던 북부 공장들의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노예 제도는 인간이 할 짓이 아니므로 폐지하자”라고 하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지만 주된 목적은 값싸게 일을 시킬 수 있는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링컨의 노예 해방은 결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실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뒷받침할 중요한 증거는 그가 ‘뉴욕 트리뷴’지에 보낸 편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편지에는 “이 투쟁에서 나의 최고의 목표는 연방(미국)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 제도를 존속시키거나 파괴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약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또한 일부를 해방시키고, 일부의 노예를 남겨둠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의 편지는 노예 해방의 진짜 의미가 ‘연방의 유지’임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노예 해방은 수단이었을 뿐 목적 자체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남부는 북부의 노예 폐지론자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로서 북부의 노동자 계급의 빈곤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북부 노동자의 처참함은 남부의 노예 제도보다 더욱 비도덕적인 죄악이라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남부에서 농사를 담당하던 흑인 노예들이 대거 북부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또한 18만5000여 명의 흑인이 북군에 입대해 전쟁에 직접 개입하였는데, 이 수는 북군 병력의 6%에 해당했다. 이로 이해 남부의 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처럼 노예 제도의 폐지는 농업에 종사하던 흑인 노예들을 산업 사회에 적합한 공장 노동력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했다. 남북 전쟁의 결과 법적으로는 흑인의 평등과 권리가 보장되었으나, 흑인의 지위가 실질적으로는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노예 해방은 이루어졌으나 공장 노동자로서의 종속된 삶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은 오늘날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완전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흑인의 권리 보호를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심화학습]

“노예 해방은 인류애의 실천이라는 목적인가, 아니면 산업화를 위한 정치적 수단인가?”라는 주제에 관하여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근거를 들어 토론하여 보자.

박승렬 LC교육연구소 소장


제도로서의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가혹한 세금… 사치와 상품 소비에 대한 욕구…

톨스토이 “우리 시대에도 노예는 여전히 있다”

노예는 주로 전쟁 포로, 영아 유기, 자식 매각의 관습에서 시작되었다. 노예를 의미하는 단어 ‘servus’의 어원이 ‘servare(포로 등의 목숨을 살려주다)’인 것에서도 이를 추측할 수 있다. 빚을 진 사람이 상대방의 노예가 되는 ‘부채 노예’제도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노예는 가족이 없고, 재산도 없고, 종교 생활도 어렵사리 인정되었으며, 신분도 세습되었다. 적어도 법적 견지에서 노예는 물건 혹은 동물로 간주되었는데, 울피아누스는 ‘시민법에 관해서는 노예는 인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를 일컬어 ‘살아있는 도구’라고 불렀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 모두 노예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었으나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그리스에서 노예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 외에 실제 가축과 다를 바 없이 여겨졌다. 따라서 노예의 해방이나 신분 상승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반면 로마에서는 해방 노예라는 신분이 따로 존재할 정도로 노예의 해방이 빈번한 일이었고, 해방 노예가 로마 시민권을 받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주인이 노예 가치의 5%에 해당하는 노예해방세를 납부하면 노예 해방이 가능했다. 노예 해방이 너무 빈번해서 제정 시대에 들어서면서 노예 해방을 제한하는 법까지 제정될 정도였다. 로마 노예제가 서서히 중세 농노제로 바뀌면서 서유럽에서 노예제는 일단 사라진다.

그러나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유럽의 식민지 정복이 시작되면서 노예 제도는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1442년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흑인 노예들을 유럽으로 끌고 왔고, 곧이어 남북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노동력의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광대한 규모의 노예 시장이 새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노예 제도는 유럽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노력에 의해 점차 사라져 갔다. 1838년 영국령 서인도제도에서, 10년 뒤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미국의 노예 제도 역시 남북 전쟁을 통해 완전히 없어졌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말한 ‘우리 시대의 노예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는 토지가 없어 노동을 팔아 생존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은 여전히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생존을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을 팔아야만 하는 노동자들, 다른 사람의 농토에서 다른 사람의 옥수수를 끊임없이 재배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곳간에다 모으기 위해서 일하는 모든 농민 역시 노예라는 것이다. 톨스토이에 의하면 러시아의 농노제 철폐와 미국의 노예제 철폐는 그저 불필요하게 된 이전 노예 제도의 낡아빠진 형태를 폐기한 것에 불과하다. 그 대신에 더욱 강력한 형태의 노예 제도가 등장하여,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사슬에 묶어 버렸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우리 시대의 노예 제도’가 발생 한 원인으로 토지 사유 제도, 가혹한 세금 제도, 도시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상품에 얽매인 욕구 등 세 가지를 주장하면서, 노예에서 해방된 진정한 자유인의 노동은 자영 농업 노동임을 강조하였다.

雍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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