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혜경궁 홍 씨 ‘한중록’

  • 입력 2007년 2월 13일 03시 00분


이번 시간에 살펴볼 고전은 한 여인의 애절한 삶이 담긴 ‘한중록’입니다. ‘한중록’은 조선시대를 살았던 비운의 여인 중 한 명인 혜경궁 홍 씨가 환갑의 나이에 쓴 회고록입니다. 혜경궁 홍 씨는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때론 담담하게 때론 애절하게 그리고 있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모든 삶을 총 6권의 책으로 기록했습니다.

혜경궁 홍 씨는 영조의 며느리이자 정조의 어머니입니다. 당시 노론의 우두머리였던 홍봉한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열 살이란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집을 떠나게 되었지요. 세자빈으로 책봉된다는 것은 임금이 될 왕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임금의 아내가 될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세상을 다 가진 듯하였을까요? 그때, 그 당시의 심정을 혜경궁 홍 씨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답니다.

“집에 머물 날이 점점 줄어들자 내 마음은 갑갑하고 슬프고 서러워, 밤이면 어머니 품에서 잤다. 두 고모와 중모께서 나를 어루만지면서 이별을 슬퍼하셨다. 부모님께서도 아침저녁으로 나를 어루만지며 어여삐 여기시고, 궁으로 들어가는 나를 불쌍히 여겨 여러 날을 못 주무셨다. 이제 다시 옛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막히는구나.”

한 나라의 안주인이 된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이런 슬픔을 안고 궁으로 들어간 혜경궁 홍 씨의 생활은 어땠을까요?

“나는 궁중에 들어온 후로 어른들께 문안드리기를 감히 게을리 하지 못하였다. 그때는 궁중의 법도가 지극히 엄하여 예에 맞춰 옷을 입지 않으면 감히 뵐 수 없었고, 날이 늦어서는 모실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새벽에 문안하는 때를 어기지 않으려고 잠을 편히 자지 못하였다.”

웃어른들을 잘 모시기 위해 잠을 설쳐야만 했던 세자빈 혜경궁 홍 씨의 삶이 부럽습니까? 혜경궁 홍 씨의 속마음은 모른 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안 인사를 드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어른들은 기뻐하기만 했습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스무 살이 된 홍 씨는, 첫아이를 잃고 훗날 ‘정조’가 될 둘째 아이를 얻게 됩니다. 홍 씨가 둘째 아이를 얻었을 때, 왕가의 사람들은 ‘왕조(王朝)를 무사히 잇게 되었다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녀로서도 매우 기쁜 일이었을까요?

“내가 20세 전의 나이였지만 찐덥고(떳떳하고) 흐뭇해하는 것이 인정에 마땅한 일이다. 이 아들을 낳아 내 신세를 아이에게 의탁하는 것 같아 마음이 신령하였던가 싶었다.”

그런데 여러분, 어미가 아들에게 신세를 의탁한다고 하네요. 여러분의 부모님도 여러분을 낳았을 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기분이었을까요?

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그리 길지만은 않았습니다. 어느덧 28세가 된 그녀는 동갑내기 남편인 사도세자를 당쟁의 희생양으로 잃어버리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그때 그 현장으로 들어가 볼까요?

영조 당시, 당쟁의 주축은 노론과 소론이었답니다. 숙종의 뒤를 이을 후사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소론은 경종을 옹호하고 나섰고, 노론은 영조를 중심으로 모여 영조의 즉위를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왕가의 법도에 따라 경종이 즉위하지만, 평소 병약했던 경종은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고 맙니다. 그 결과 영조가 경종의 뒤를 잇게 되었고, 영조가 즉위함에 따라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당쟁의 폐해를 경험했던 영조는 혼란스러운 당쟁을 잠재우기 위해 탕평책을 펼칩니다. 탕평책이란 각 당파에서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여서 어느 한쪽에 힘의 치우침 없이 각 당파 간의 균형을 꾀한 정책을 말하는데요, 이러한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쟁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도세자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뒤주에 갇혀 굶어죽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지요. 다시 말해, 아버지 영조에 의해 아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당시를 혜경궁 홍 씨는 이렇게 기억합니다.

“서글프고도 서글프도다. 모 년 모 월일의 일을 내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하늘과 땅이 맞붙고, 해와 땅이 어두운 변을 만났으니 내가 어찌 잠깐이라도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겠는가. 칼을 들어 목숨을 끊으려 하였지만 옆에 있던 사람이 빼앗아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참고 참아 모진 목숨을 보전하며 하늘만 부르짖었다.”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의 고통과 슬픔이 짙게 배어나오는 구절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요, 자신의 남편인 사도세자가 8일 동안 뒤주에서 조금씩 죽어가는 동안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도대체 혜경궁 홍 씨는 왜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기만 했을까요? 이런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런데 그녀의 비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얼마 후 더 큰 비극을 맞게 되지요. 그에 대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런고로 선왕(정조)은 이를 데 없이 미워하며 후일을 별렀다. 중부를 여산으로 귀양보낼 때에 전교하시기를 여러 가지 죄목으로 논란하여 다시는 세상에서 사람 노릇을 못하게 죄어 매었다. 선왕은 본래 외가에 불편한 마음이 있어서 한 번 풀고자 하셨지만, 차마 노모를 두고 어찌 외가를 망하게 하실 뜻이 있었겠는가.”

‘선왕이 외가를 망하게 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 더 말하지만, 이때의 선왕은 혜경궁 홍 씨의 아들을 뜻합니다. 아직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고요? 그럼 반드시 ‘한중록’ 속으로 들어가 보기를 바랍니다.

한선영 학림 필로소피 논술 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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