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장 장병들…그들은 오늘밤도 묵묵히 철책 앞에 선다

  • 입력 2005년 12월 30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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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저녁 강원 철원군 육군 6사단 예하 최전방부대 장병들이 비무장지대(DMZ) 철책에 이상이 없는지를 점검하고 있다. 매서운 삭풍 속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장병들의 근무태세엔 빈틈이 없었다. 철원=윤상호 기자
27일 저녁 강원 철원군 육군 6사단 예하 최전방부대 장병들이 비무장지대(DMZ) 철책에 이상이 없는지를 점검하고 있다. 매서운 삭풍 속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장병들의 근무태세엔 빈틈이 없었다. 철원=윤상호 기자
“총기 탄약 이상 무∼, 초전박살.”

27일 밤 강원 철원군 육군 6사단(사단장 임관빈 소장) 예하 최전방부대의 한 소초. 소총과 실탄으로 무장한 장병들의 함성이 얼어붙은 밤하늘을 흔들었다. 온도계의 눈금은 영하 18도. 그러나 휘몰아치는 강풍 탓에 체감온도는 영하 25도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추위였지만 소초에서 수십 m 떨어진 비무장지대(DMZ) 철책 경계근무에 투입된 장병들의 모습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철책 너머 DMZ를 예리한 눈초리로 감시하던 함성우(22) 일병은 “여기서 군사분계선까지는 2km에 불과하다”며 “야간경계 때는 온몸의 감각을 총동원해 적의 침투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군은 총기난사 사건, 훈련소 인분 사건 등 잇단 악재로 곤욕을 치렀다. 사회 일각에선 시대적 변화에 뒤처진 군에 싸늘한 시선을 보냈고, 군대는 갈 곳이 못 된다는 ‘혐군(嫌軍)론’이 확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응한 장병들은 용광로 같은 젊음으로 한파와 맞서며 묵묵히 휴전선 155마일의 철책을 지키고 있었다.

곳곳에 설치된 ‘지시 불이행 시 발포’라는 경고문과 정적을 깨며 가끔씩 철책 너머로 들려오는 북한군의 포성, DMZ 내 야생동물이 밟은 지뢰 폭발음은 이곳이 남북 대치의 최전선임을 일깨웠다.

소대장 김효은(25) 소위는 “철책 경계에는 명절 휴일이 없고, 상황이 발생하면 밤을 새우기 일쑤지만 내 부모 형제를 최전선에서 지킨다는 각오로 부대원들이 똘똘 뭉쳐 있다”고 말했다.

과거 최전방부대는 열악한 근무여건과 구타, 가혹행위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병영 현대화 작업과 함께 군이 과거의 폐습 근절에 나선 최근 몇 년 사이 병영의 모습은 크게 바뀌었다.

지난해부터 현대식으로 건립되고 있는 최전방 소초들은 냉온방 장치와 널찍한 침대형 내무실, 수세식 화장실, 위생적인 식당, 위성방송 시설을 갖추고 있다.

최장욱(23) 병장은 “구형 막사에서는 침상형 내무실에서 ‘칼잠’을 자고, 한겨울에도 찬물로 머리를 감아야 했지만 이젠 온수로 샤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신세대 장병들의 입맛에 맞춰 돈가스 돼지갈비 삼계탕 스파게티가 제공되는 등 식단도 다양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후임병이 내무실에서 TV 리모컨을 만지거나 웃는 모습은 꿈도 못 꿨지만 요즘은 일과 후엔 개인 활동이 최대한 보장된다. 식사를 마친 장병들은 독서, 체력단련, 게임을 하거나 소초에 별도로 설치된 전화로 가족 등과 통화를 하는 등 자유시간을 보낸다.

한 선임병은 “일병 때까지 구타가 있었지만 이젠 거의 사라졌다”며 “얼마 전 친구로부터 선임병으로 ‘군림’하는 기분이 어떠냐는 편지를 받고 후임병에게 보여주며 함께 웃었다”고 말했다.

28일 오전 6시 반 오전 점호.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을 응용한 병영무(兵營舞)로 몸을 푼 장병들이 포효하듯 힘차게 군가를 부르며 캄캄한 연병장을 내달렸다.

장병들이 최전방의 새벽을 깨우는 동안 둘러본 내무실 한쪽 구석에서 액자 속의 시구가 눈에 띄었다. 장병들이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마련해 놓은 듯했다.

“밤마다 네 하루를 살펴보라… 그리고 너의 사랑하는 자를, 너의 어머니를, 유년시절을 생각하라… 너는 때 묻지 않은 자가 되고 새날을 밝은 마음으로, 영웅으로, 승리자로 시작할 것이다.”(‘밤마다 네 하루를 살펴보라’, 헤르만 헤세)

철원=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최전방 소초 생활은▼

최전방 철책을 감시하는 육군 소초는 일몰 후엔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다. 기자는 민간인통제소를 통과한 뒤 여러 차례 검문을 거쳐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초 옆엔 수십 m 간격을 두고 남책-중책-북책 등 3중 철책이 세워져 있다. 철책경계에 투입되는 장병들은 철책과 비무장지대에 이상이 없는지를 철두철미하게 확인해야 한다. 근무가 잦을 때면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수면 부족일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수색대대는 매일 소초 앞 통문을 통해 ‘지뢰밭’인 DMZ 깊숙이 들어가 거의 하루 종일 매복과 수색 임무를 수행한다. 북한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DMZ 내의 감시소초(GP)는 ‘최전방 중의 최전방’이다.

소초 주변은 황량한 야산과 들판이어서 장병들은 여름엔 무더위와 모기떼, 겨울엔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야 한다. 폭설이라도 쏟아지면 소초는 외부와 고립된다. 몇 개월간의 소초근무 기간엔 정기휴가를 제외한 외출 외박이 엄격히 통제돼 장병들은 주로 체육활동과 독서, TV 시청으로 여가를 보낸다.

매주 한 차례씩 각 소초를 방문하는 PX 차량(일명 황금마차)은 장병들이 가장 기다리는 ‘손님’. 모아둔 월급으로 과자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며 잠시나마 긴장을 푼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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