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화이트칼라]<下>점점 세지는 노동강도

  • 입력 2005년 5월 1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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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야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9 to 5’는 잊은 지 오래. 화이트칼라가 많이 근무하는 서울 시내 대형빌딩은 야근을 하는 직원들로 불이 꺼지지 않는다. 고용불안 속에서 노동 강도가 높아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화이트칼라가 늘어나는 추세다. 김미옥 기자
오늘도 야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9 to 5’는 잊은 지 오래. 화이트칼라가 많이 근무하는 서울 시내 대형빌딩은 야근을 하는 직원들로 불이 꺼지지 않는다. 고용불안 속에서 노동 강도가 높아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화이트칼라가 늘어나는 추세다. 김미옥 기자
서울 강남의 한 정보기술(IT) 업체에서 8년째 일하는 S(35) 씨.

서울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줄곧 IT 업체에서 일해 온 그는 최근 자신과 동료들의 생활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같이 일했던 30대 중반의 과장이 얼마 전 근무시간에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다. S 씨는 하루 평균 13, 14시간 일한다. 프로젝트를 맡으면 몇 주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밤샘 작업을 한다. 야근 수당을 따로 받는 건 아니다.

아내가 첫아이를 가졌을 때도 석 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회사에서는 사무실 근처에 여관을 잡아놓고 일하다가 여관에 가서 자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주5일 근무제가 본격 시행됐지만 대부분의 화이트칼라에게는 남의 일이나 마찬가지. 본보 취재팀을 만난 화이트칼라 직장인 10여 명은 대부분 극심한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이들은 자신의 신세를 ‘7-24’로 표현했다. 일주일에 7일, 하루에 24시간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9 to 5’는 희망일 뿐이다.

한 시중은행 차장으로 근무하는 A(43) 씨는 영업시간이 끝나는 오후 4시 반 이후가 두렵다.

영업점별로 직원이 모여 ‘독려회의’를 하는 시간. 말이 ‘독려’지 사실은 ‘압착’ 또는 ‘독촉’이다. 대출이나 펀드 상품 등 영업성과가 왜 이렇게 부실하냐는 질책을 듣는 자리. A 씨는 “그 자리에서 언제까지 얼마를 팔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뿐 아니다. 보고서 작성, 회의 자료 준비, 고객관리 방안 마련에 머리를 싸매야 한다. 최근 2주간 오후 10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없다. 주말 출근과 야근도 밥 먹듯 해야 한다.

밥 먹는 시간도 줄여야 하기 때문에 A 씨 책상에는 사무실에 음식을 배달해 주는 중국집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화이트칼라는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한다 하더라도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감수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밀려난 동료와 선후배의 모습을 보면서 일이 많다고 투덜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기업의 ‘조직 슬림화’ 또는 ‘인건비 절감’ 노력은 화이트칼라의 근로 여건을 악화시킨다.

대기업의 기획 부서에서 일하는 입사 2년차 C(29) 씨는 장기계획 수립 등 본연의 업무 외에도 경리 등 단순사무 업무를 함께 한다. 경비 절감을 이유로 회사가 각 팀의 계약직 서무 직원을 없앴기 때문.

그는 “원칙대로라면, 또 마음만 먹으면 주5일 근무에 ‘칼퇴근’이 가능하지만 로또에 당첨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있는 직원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한국은 ‘적게 받고 많이 일하는’ 국가다. 1인당 연간 2390시간을 일한다. 30개 회원국 중 최고. 단위노동비용은 회원국 평균을 100으로 봤을 때 80.9. 다른 국가에서 100만 원 받는 일을 한국의 직장인은 80만 원을 받고 한다는 얘기다.

고려대 박길성(朴吉聲·경제사회학) 교수는 “화이트칼라가 구조조정의 주 타깃이 되면서 근로 환경과 사회적 대우가 갈수록 열악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사무실에 CCTV…졸다간 딱걸린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기업이 직원에 대한 관리와 감시를 강화하는 것도 화이트칼라에게는 스트레스다.

출퇴근 시간 체크는 기본. 인터넷 검색을 차단하고 근무하는 모습을 24시간 촬영했다가 경고를 내린다.

직원을 감시하는 수단은 정보기술(IT)의 발달로 다양해졌다. 우선 자체적으로 만든 메신저를 이용토록 하는 기업이 늘었다. 외부 메신저나 미니홈페이지 사이트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포털사이트 접속을 차단하는 기업도 늘어나는 추세.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A(35) 씨는 최근 소속 부서장에게 경고를 받았다. “근무시간에 자리를 자주 비우는 것 같은데 계속 그러면 인사조치하겠다”는 내용.

A 씨는 당황스러웠다. 그의 자리는 직장 상사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얼마 뒤 그는 동료로부터 회사 안에 설치된 폐쇄회로(CC) TV가 직원의 모든 행동을 녹화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신용카드 계열사를 가진 대기업 직원들은 소속 부서에 상관없이 모두 영업사원이 된 지 오래다. 카드 가입자를 늘리라는 회사의 지시는 이제 ‘하면 인센티브, 안 하면 그만’이 아니라 ‘안 하면 불이익’인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C(28·여) 씨는 “회사에서 새 유형의 카드가 나올 때마다 가족이나 친척에게 카드를 바꾸도록 부탁하느라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하소연했다.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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