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피해 당한것도 억울한데… “수사내용 왜 안 알려주나”

  • 입력 2005년 2월 21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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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피해자는 답답하다. 피해를 당한 뒤 고소를 해서 수사가 이뤄져도 수사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가해자)의 인권에 비해 피해자의 권리 보호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표적인 경우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알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례=서울에 사는 P 양(17)은 2000년부터 친아버지에게서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P 양은 지난해 12월 아버지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고 검찰은 이달 7일 아버지를 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검찰이 보낸 사건처리 결과 통지서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구속 구 공판’(피의자를 구속 상태에서 법원의 재판에 넘기는 것)이라는 다섯 자만 찍혀 있었다. P 양 측은 수사 결과가 담긴 공소장을 복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불(不)허가’ 답변만 받았다.

경기 군포시 모 고교에 다니던 C 군은 지난해 4월 교사의 체벌을 두려워하다가 학교 근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가족은 교사를 고소했다. 검찰은 같은 해 12월 해당 교사의 처리와 관련해 일부 고소 내용에 대해서는 기소하고, 일부는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한다는 짤막한 통지를 해 왔다. C 군 가족도 공소장 복사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아나운서 지망생이었던 H 씨(27·여)는 지난해 4월 모 방송사 아나운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가해자를 고소했다. H 씨는 검찰로부터 가해자를 무혐의 처분했다는 통보만 받았다. H 씨는 재수사해 달라고 고등검찰청에 항고한 뒤 이달 11일 사건기록을 복사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위의 세 사건 고소인들은 22일 검찰을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내기로 했다. 검찰의 ‘사건기록 복사 불허가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취지다.

범죄 피해를 당했지만 수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어떤 법을 적용했는지 알 길이 없어 더 억울하다는 것이 이들의 하소연이다.

▽누구를 위한 법인가=형사소송법은 고소사건을 처리한 뒤 7일 이내에 고소인(피해자)에게 서면으로 처분의 취지를 알려 주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이 법 규정의 ‘취지’를 좁게 해석해 극히 제한적으로 내용을 통지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피의자를 구속기소할 경우 ‘구속 구 공판’이라고만 통보해 준다. 공소장을 복사해 달라고 하면 피의자(피고소인 또는 가해자)의 인권 보호를 내세워 거부한다.

피의자를 불기소할 경우에는 형소법의 규정에 따라 불기소 이유를 설명해 주기는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상세한 사건 기록 등은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피해자로서는 수사 내용의 어떤 점이 부당한지 알기 어렵고 수사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고검에 항고하거나 재정 신청을 하기도 쉽지 않다.

김승규(金昇圭)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9월 “범죄 피해자는 연락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재판이 종결되고 범죄인이 석방되는 실정”이라며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 주고 상처를 이해해 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법무부는 두 달 뒤 ‘범죄 피해자 기본법안’을 만들어 입법예고했다. 이 법안은 피해자가 원할 경우 가해자에 대한 수사, 재판, 형 집행 상황 등을 일일이 국가가 통보해 주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 결과가 담겨 있는 공소장 등을 받아 보는 것은 여전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 관계자는 “피의자의 인권 침해 우려가 있어 기본법이 제정되더라도 사건 기록 등을 피해자에게 복사해 주는 것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사건기록 복사불허’ 공방▼

검찰을 상대로 한 범죄 피해자들의 ‘사건기록 복사 불허가처분 취소 소송’을 지원하고 있는 강지원(姜智遠) 변호사는 21일 “검찰 독재시대도 아닌데 수사기록을 가해자에게는 제공하면서 피해자에겐 제공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 변호사는 법원이 피해자들의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헌법소원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이 규정 하나만 만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며 “검찰이 지나치게 피의자 인권 보호에만 신경 쓰다 보니 정작 보호해야 할 피해자 권익은 등한시 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강 변호사는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한 경우에도 고소인은 짤막한 불기소처분 사유서 외에 다른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범죄 피해자를 대신해 국가가 수사와 소송을 대행하는 현 국가 소추주의 제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검찰 관계자는 “통상 고소인은 고소 이유를 잘 알고 있지만 고소를 당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면서 “게다가 국내 고소 사건의 70∼80%가 무혐의 처리되는데 그런 사건 수사기록을 모두 고소인에게 보여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고소는 검찰 수사의 단서일 뿐으로, 고소를 했다고 그 사건에 대한 수사 기록을 다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라며 “다만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최근 피해자들에게도 기소, 재판 날짜 등을 일일이 통지해 주는 추세로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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