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의원, 유홍준 문화재청장에 보낸 공개서한 전문

  • 입력 2005년 1월 27일 10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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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문화재 청장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의 부탁으로 부산 ‘역사모’(역사를 사랑하는 모임) 모임에 오셔서 감동적인 강의를 하고 간지도 벌써 2년이 지난 듯합니다. 작년 말 국회에서 언뜻언뜻 조우했지만 긴 얘기 나눌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런 대학동창에게 이렇게 긴 글을 보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새로운 추억거리라고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편하게 ‘자네’라고 부르고 싶지만 오늘은 개인적 관계를 넘어서 공적 영역의 얘기를 하고 싶어 ‘유청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얼마 전 유교수가 문화재 청장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쌍수를 들고 환영했습니다. 우리 문화에 대한 국민의 눈높이를 한껏 끌어올린 장본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때 ‘아는 것만큼 본다’라는 말이 대유행이었고 마치 ‘성지순례의 지침서’처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부동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습니다. 저 아내 역시 밤을 새워 읽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치 제가 저자이기나 하듯이 뿌듯했습니다. 노대통령이 오랜만에 제대로 인사를 했다고 후한 평가도 주었습니다. 천하의 유홍준이가 문화재 행정의 수장이 된 만큼 우리 문화재 관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말입니다.

유청장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남해 가천마을의 다랑이 논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등 탁월한 감각을 보여줬습니다. 고궁의 입장료를 100%이상 인상하겠다는 결정에 대해서도 반대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고궁의 품격을 위해 수긍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광화문 현판’ 사건은 사실 좀 의외였습니다. 처음에는 현판을 바꿔야하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겠지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몇 일 동안 신문보도를 보고 이게 아닌 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편지를 띄우게 되었습니다.

유청장, 정말 다가오는 광복절 날 ‘광화문’ 현판을 교체하려고 합니까. 국민들은 많은 의문을 표시합니다. 왜 하필 이때냐는 것입니다. 광화문을 새로 축조한 것도 아니고 원형대로 복구한 것도 아닌데 유독 현판을 왜 바꾸려하는지 선뜻 이해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 대로중앙의 랜드마크나 다름없는 광화문 현판을 갑작스럽게 바꿔치기 하려는 의도에 대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왜 하필이면 광화문과 별로 관계도 없는 정조(正祖)글씨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해서 ‘억지 현판’을 걸겠다는 발상은 별로 문화스럽지 못하다는 지적입니다. 물론 유청장이 노대통령을 정조로 비유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일부의 주장에 저는 동조하고 싶지 않습니다.

유청장은 대학교 때부터 군사문화의 잔재를 두드러기 날 정도로 싫어했던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소위 국적불명의 문화재 복원, 획일화된 ‘이발소 그림’ 같은 행정을 강하게 비판하곤 했지요. 그렇다고 한글 ‘광화문’ 현판을 내려야 하는지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든 그 글씨가 누구의 것이든 ‘광화문’ 현판은 현재의 광화문 건물의 중건과 함께 버젓이 걸렸고 30년 이상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울의 문패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역대 대통령들이 문화재나 신축청사 등의 현판이나 머릿돌을 자기가 직접 써서 다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학생 때도 싫어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의 대통령은 이런 짓 제발 안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싫든 좋든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이고 실체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든 자랑스런 역사가 있는 반면 숨기고 싶은 역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숨기고 싶은 역사, 부끄러운 역사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후손들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지난 93년 김영삼 전대통령이 중앙청을 허물겠다고 했을 때 저는 비록 여당의원이었지만 공개적으로 안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중앙청이 일제시대의 착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또한 광복의 상징이요,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역사적 현장이자 6·25전쟁 중 서울 수복의 감격이 서린 건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건물은 깡그리 없어졌습니다. 조선총독부 건물만이 아니라 중앙청도 함께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광화문’ 현판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군정종식을 외쳤던 YS조차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중심대로의 현판은 살려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청장이 광화문 현판을 내린다고 하니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광화문’의 한글 현판은 당시로서 매우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원상복구 현판도 아닌 정조의 글씨로 집자해서 ‘가짜현판’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반역사적 발상이 아닌지 두렵기조차 합니다. 나름대로 그 현판에는 그 시대의 정신과 아픔이 녹아있는데 이를 외면하고 과거의 형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역사의 회복은 아닐 것입니다.

유청장, 이제 냉정히 우리 역사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잘한 것은 잘한대로, 못한 것은 못한 대로 평가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승자에 의한 역사파괴는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사랑하지 못하고 존경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 승자에 의한 역사왜곡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최근 부상하고 있는 과거사 문제는 정치권의 회오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재 관리는 현재의 정치적 이슈에서 한발 물러나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 고고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산이 강을 넘지 못하듯 인간 또한 역사의 강을 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광복 60주년이 되는 그날, ‘광화문’ 앞에서 유청장의 살아 숨쉬는 역사 강의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과욕은 아니겠지요. 소식기다리겠습니다.

2005. 1. 26.

국회의원 김 형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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