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준]‘수능시험’ 국민신뢰 무너졌다

  • 입력 2004년 11월 22일 18시 20분


코멘트
“이런 시험에 내 인생의 12년을 걸었다는 것이 한심합니다.”

이번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한 대규모 조직적 부정행위가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드러난 뒤, 교육인적자원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온 수많은 글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 하루의 시험을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해온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충격과 분노를 가늠케 한다. 하지만 이들의 충격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이 분노하는 것은 그동안 많은 수험생 사이에서 비공식적으로 언급되었던 사실이 이제야 공식적으로 확인되었고 진작 대책을 강구했어야 할 교육당국이 방관적 태도로 일관하다가 마지못해 사후약방문 격의 처방을 내놓고 책임 회피에 급급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입정책 혼란이 ‘유혹’ 부추겨▼

이번에 드러난 부정행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많은 사람의 의혹이다. 인터넷에는 광주 일부 학교들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광범한 시험부정이 있었으며, 부정행위에 가담한 사람도 수천명에 이를 것이라는 ‘고발’이 꼬리를 문다. 휴대전화 부정도 올해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고 그동안 선배에서 후배로 ‘대물림’되어 왔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인터넷에 제기된 여러 의혹을 모두 믿을 필요는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선배들도 과거 그렇게 했다, 남들도 그렇게 한다”며 참여를 권유했다는 진술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런 의혹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일각에서는 부정행위를 하더라도 성적을 올릴 수 있는 확률이 높지 않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의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정행위에 가담해 답안을 송신한 학생들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벗어난다. 조직적인 부정행위가 자행되고 교육당국이 이에 대해 속수무책이기 때문에 수능시험의 권위와 공정성이 떨어지며, 결과적으로 이 나라 교육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기대가 떨어진다는 데에 진정 큰 문제가 있다. 도대체 이런 엉망 수능시험을 갖고 어떻게 진학 준비를 하겠느냐는 학부모 학생 교사들의 목소리가 높다. 수능시험 무용론이 대두될 지경이다.

그렇다고 수능시험을 없애고 내신만으로 학생을 뽑으면 문제가 해결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문제가 되는 엄청난 ‘소도둑’들이 바늘 도둑질을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학교 안이었기 때문이다. 입시에 반영되는 내신 성적을 좋게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일선 교사들이 시험문제를 어렵게 내지 못할 뿐 아니라 부정행위에 대해서도 엄단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학교시험에서 묵인된 부정행위가 수능시험에까지 연장된 셈이다. 결국 이번 부정사건은 이제까지 교육정책의 문제점들이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교육정책 뿌리부터 재검토를▼

교육당국은 이번에 드러난 부정행위와 관련해 직무유기의 비난을 면키 어려울 듯하다. 고사장에 휴대전화를 갖고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이것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서, 경찰 신고를 통해서 제보가 있었는데도 구체적 대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육당국이 받아야 할 진정 큰 비난은 현재의 교육정책이 이러한 부정행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당국의 입시정책에 근본적인 문제가 없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대로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절망케 한다면, 너무나 복잡하고 불투명한 규칙과 방식 때문에 입시를 도박처럼 느끼게 만든다면, 그래서 일부 수험생들로 하여금 실력보다는 편법과 부정에 의존하고픈 유혹을 참지 못하게 만든다면…. 이런 정책은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준 연세대 교수·사회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