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사람들]<中>重病걸리면 健保 있으나마나

  • 입력 2003년 7월 25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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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이혼, 누나 집 더부살이,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2000년 10월 백혈병 진단을 받은 K씨(33)의 모습이다. 발병 당시 K씨는 의욕이 넘치는 사업가였다. 외환위기 때 위기를 맞았지만 곧 재기해 아내와 밝은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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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K씨는 4차례 입원하면서 치료비를 대기 위해 32평형 아파트를 팔고 전세로, 다시 반(半)지하 월세로 살림을 줄였다. 치료비가 많이 들어갈 때 태어난 아이마저 선천성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았다. 자연히 아내와는 다툴 일만 생겼고 결국 갈라서고 말았다.

‘돈 빌려 달라’는 말을 듣기 싫었는지 친구들은 점차 멀어졌다. K씨는 사는 게 힘들어 3차례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K씨는 “의료급여 대상자가 돼 이제 글리벡 약값을 내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백혈병은 외환위기보다 더 무섭다”고 말했다.

국민보건 향상과 사회보장 증진을 표방하는 국민건강보험이 중병 환자들에게는 별다른 ‘방패막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중병에 걸릴 경우 수중에 있는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파산이나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중병에 무력한 건강보험=환자의 치료비는 보험이 적용되는 급여부분과 적용되지 않는 비(非)급여부분으로 나뉜다. 건강보험공단이 부담하는 급여부분에도 환자가 납부하는 ‘본인 일부 부담금’이 별도로 들어있다.

본인 일부 부담금은 외래 환자의 경우 급여총액을 기준으로 △동네의원 30% △병원 40% △대학병원 50%이고 입원 환자의 경우 일률적으로 20%이다.

본인부담금과 비급여를 합쳐 환자가 직접 내는 돈은 총 진료비의 50%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백혈병이나 장기이식, 암 환자들은 건강보험이 ‘사회보험’이 아니라 ‘할인보험’이라고 주장한다. 치료비가 없으면 빚을 지거나 아예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백혈병환우회 권성기(權星基) 사무국장은 “50세가 넘은 백혈병 환자들 가운데 치료비를 마련하느라 진 빚을 자녀에게 넘기지 않으려고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아 가족 해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보완대책은 한계=보건복지부는 본인부담금이 한달 기준으로 120만원을 넘으면 초과액의 절반을 돌려주는 보상금제를 시행하고 있다. 예컨대 비급여를 제외한 본인부담금이 300만원이라면 120만원을 제한 초과액 180만원의 절반인 90만원을 돌려받는다.

그러나 병원은 대개 1∼2개월 치를 모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심사청구를 하고 평가원은 이를 3개월 정도 심사한다. 따라서 환자는 병원비를 치른 뒤 4∼5개월이 지나야 초과액의 절반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또 복지부가 도입하려는 ‘본인부담금 상한제’에 대해서도 중병 환자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복지부가 검토 중인 상한선 300만원의 혜택을 보려면 입원 환자의 경우 본인부담금이 20%이기 때문에 한번의 급여 총액이 1500만원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환자는 많지 않다는 것.

의료소비자단체인 건강세상네트워크 김창보(金昌보) 사무국장은 “본인부담금 상한제 도입을 환영하지만 중병 환자가 2명 이상 있는 가구에도 혜택을 주는 등의 세부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국민에게 환상만 심어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병원의 비합리적인 관행=지난달 간 이식수술을 받은 J씨(34)는 8000만원을 병원에 예치하고 입원했다. 총 진료비는 6500여만원이었다.

병원측은 “중병 환자들이 나중에 치료비를 못 내겠다고 하면 어쩌느냐”며 불가피한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현행 국민건강보험법은 입원보증금 등의 돈을 받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병원이 사전에 현금으로 받는 예치금이나 선수금은 그 내용을 따져봐야 한다”며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일부 동네의원이 감기환자에게 항생제와 주사제 등을 처방하는 것에 대한 과잉진료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건강보험 재정에서 감기에 2조원이 지출된 데 비해 암에는 불과 7000억원이 지급된 것으로 복지부는 추산했다.

보건사회연구원 최병호(崔秉浩) 사회보험연구팀장은 “건강보험 재정을 단기에 늘릴 수 없으므로 감기와 같은 질병에는 가입자가 비용을 더 부담하도록 하고 남는 재원으로 백혈병이나 암 등에 지출하는 내부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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