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매혈’사건 “검찰 고위층이 수사중단 지시”

  • 입력 2002년 9월 14일 00시 54분


혈우병 환자들의 에이즈 집단 감염 연구결과의 발단이 된 90년 ‘사기 매혈’ 사건을 수사한 검사가 당시 에이즈 감염자 여러 명이 피를 판 사실을 확인하고 수사를 확대하려 했으나 검찰 고위 간부의 지시로 수사를 중단한 사실이 13일 밝혀졌다.

1990년 5월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지검 서부지청의 한 수사 관계자는 이날 본보 기자와 만나 “에이즈 감염자 여러 명의 피가 수십 차례에 걸쳐 제약사 등을 통해 시중에 유통된 사실을 확인하고 수사를 확대해 해당 혈액을 전량 폐기하자고 주장했지만 상부에서 묵살했다”고 밝혔다.

당시 수사팀은 80년대 일본이 미국에서 수입한 혈액으로 만든 일부 혈우병 치료제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오염돼 혈우병 환자 1800여명이 감염되고 400여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연구 보고서도 작성해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검찰 주변에서는 수사가 확대될 경우 헌혈 급감 등 사회적 혼란이 일 것을 우려한 제약회사들이 검찰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 것으로 알려져 검찰 고위 간부가 수사 중단을 지시한 경위에 대한 의혹이 일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의 주임 검사였던 서부지청 특수부 임운희(林雲熙·현재 변호사) 검사는 수사 중단 직후 사표를 제출하면서 “5년, 10년 뒤 에이즈가 창궐하면 당신 책임”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국립보건원의 조사 결과 에이즈 감염자의 혈액을 원료로 만든 국산 혈우병 치료제를 주사맞고 에이즈에 집단 감염됐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해 수사 중단 경위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당시 서부지청 특수부는 피를 팔러 오는 사람들에게 1회 채혈 규정량인 500㏄보다 60㏄가 더 많은 560㏄의 피를 몰래 뽑거나 ‘72시간 내 재매혈 금지’ 규정을 어긴 모 제약사 산하 지역혈액원장 임모, 손모씨 등 4명을 혈액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검찰은 이들 혈액원이 88년 1월부터 90년 5월까지 34만여명의 매혈자들에게서 규정량보다 많은 피를 뽑아 2억5000만원의 부당이득을 챙겼으며, 하루 평균 110명의 매혈자들을 대상으로 72시간 이내 채혈 금지 규정을 어기고 피를 사들였다고 발표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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