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체류 25만명 시대上]“비인간적 대우 이젠 못참아요”

  • 입력 2002년 5월 27일 18시 43분


《국내에 불법 체류중인 외국인들의 실태 파악과 제도권 내 수용을 위한 ‘불법체류자 자진신고’가 25일로 마감됐다. 이날까지 집계된 불법 체류자는 모두 25만3500여명. 국적별로는 중국(중국동포 포함)이 14만5000여명, 방글라데시 1만5000여명, 필리핀 1만5000여명, 몽골 1만3000여명 등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1년 동안의 유예기간이 끝나면 이들이 자진 출국하도록 지도하고 있으나 전망은 불투명한 상태. 자진신고를 계기로 불법 체류자들의 삶과 신고 이후의 행태, 불법 체류자들을 고용해 쓸 수밖에 없는 우리의 경제구조, 불법 체류자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 등을 3회에 걸쳐 게재한다.》

자진신고제가 가져온 일차적 변화는 민원 제기의 급증이다.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 때문에 그동안은 임금체불이나 폭행 같은 부당행위를 당해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 신고로 적어도 내년 3월 말까지는 신분상의 불이익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98년 우크라이나에서 온 뮐로프씨(25)는 지난달 중순 신고를 마치자마자 경기 성남시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 민원을 제기했다. 지난해 5월 프레스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했지만 600여만원에 이르는 치료비를 한푼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6개월 동안 치료를 받느라 일을 못해 월급도 전혀 받지 못했는가 하면 치료가 끝난 뒤에도 작업성과가 남들보다 적다는 이유로 기존 월급의 80%만 받고 있는 실정이다.

뮐로프씨가 그동안 받은 비인간적인 대우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지난 3년여 동안 동료 6명과 함께 경기 광주시의 공장 부지에 있는 컨테이너에서 생활해 온 그는 “겨울에는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얼어붙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지시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매를 맞는 것도 다반사였다.

다른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뮐로프씨의 경우와 비슷하다.

지난해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 민원을 제기한 외국인 노동자 1400여명의 경우를 보면 46%가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폭행과 사기를 당하거나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신고도 적지 않았다.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이번 자진신고제는 ‘이제 월급을 제대로 받을 수 있고 맞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뮐로프씨는 “1년 후의 일을 염려하기보다는 당장 맞지 않고 못 받은 돈을 받을 수 있다면 그만”이라며 “그동안 신고가 무서워 아무소리 못하고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부당한 행위에 적극 대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조선족 박모씨(37)도 “어쨌든 1년 동안은 부당행위를 당하면 떳떳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우선 밀린 월급부터 받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신분상의 불이익이 해소됨으로써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는 지난해 하루 평균 2, 3건이던 민원 상담건수가 지난달 초부터 5, 6건으로 늘었다.

경인지방노동청 안산지방노동사무소에도 2월 12건, 3월 16건에 불과하던 민원이 4월에는 23건으로 늘어났다.

불법체류 자진신고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주로 고용하고 있는 10인 미만 영세 사업장 업주와 외국인 노동자들간의 마찰도 잦아지고 있다.

광주에서 외국인 노동자 4명을 고용해 플라스틱 제조공장을 운영하는 김모 사장(56)은 자금난으로 두 달이 넘게 월급을 주지 못하고 있지만 이들이 막무가내로 월급을 요구해 애를 먹고 있다.

김 사장은 “부당한 임금체불이나 폭행은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지만 우리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도 많이 있다”며 “불법체류 자진신고 이후 외국인 노동자들과의 마찰로 ‘도저히 못해 먹겠다’는 업주들의 하소연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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