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현주소]1화

  • 입력 2001년 1월 27일 14시 13분


한 일간지 홈페이지에 수록된, 지난 한 달 동안 일어난 성범죄 관련 기사 목록을 살펴보자.

△<성추행> 부하 여장교 성추행 혐의 육군사단장 보직해임…01/08 18:31

△<성희롱> 경총, 성희롱 예방 비디오 2편 제작…01/07 11:12

△<성폭력> 인터넷으로 만난 여자 감금 성폭행…01/04 09:29

△<성폭력> 장애여성 성폭행 1명 체포…01/04 08:30

△<성희롱> 식당 여성 종업원 성희롱·폭행에 시달려…12/30 12:01

△<성희롱> 민노총, 성폭력 진상조사 나서…12/30 10:37

△<성폭력> 주병진씨, 보석 석방…12/29 13:53

△<성폭력> 이웃집 모녀 상습 성폭행 50대 체포…12/28 10:51

△<성추행> ‘제자 성추행 교사’ 교단 추방 촉구…12/26 16:55

△<성희롱> 부산경찰청장 여성 비하 발언, 여성단체 반발…12/20 16:09

△<성폭력> 구인광고 보고 찾아온 여대생 등 성폭행…12/19 09:36

△<성폭력> 주병진씨 성폭행 혐의 기소…12/15 09:11

△<성추행> 성추행 물의 고교장 사표…12/14 11:28

△<성폭력> 진보진영 성폭력 사례 인터넷 공개, 실명 거론 논란…12/14 07:02

△<성추행> 친딸 성폭행 징역 10년 선고…12/13 19:18

△<성추행> 여자 어린이 성추행한 학습지 교사 구속…12/11 11:18

△<성추행> 초등생 여아 성추행, 60대 피아노학원장 영장…12/11 08:51

△<성추행> ‘교장이 여교사 성추행’ 경북교육청 감사…12/08 15:35

갑자기 성범죄 사건의 봇물이 터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범죄는 예전부터 있어 왔다. 다만 전엔 쉬쉬하고 감췄던 얘기를 꺼내기 시작한 것뿐이다. 범죄로 여겨지지 않거나 단죄되지 않던 일들이 여론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남자들은 이제 여성과 성 문제에 관한 한 공석에서는 물론 사석에서도 말조심해야 한다.남성들이 여성과 성범죄에 대한 인식을 혁신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망신 퍼레이드는 한동안 계속 펼쳐질 것이다.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가슴 크기를 언급했다가 국회에서 사퇴압력을 받은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 김명자 환경부장관에 대해 ‘아키코상’ 어쩌구 하며 “안경 쓴 여자는 매력이 떨어진다”는 ‘소신’을 밝혔다가 사표 쓴 환경부 고위 간부, “여자가 똑똑하면 피곤하다. 좀 얼빵한 맛이 있어야 한다”고 ‘공식발표’했다가 여성계의 반발로 공식사과해야 했던 부산경찰청장 등이 망신행렬의 맨 앞줄을 차지한다. 이들은 살신성인(?)의 자세로 남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죽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한마디로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남성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얘기일지 모르지만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로 불린다. 국지전이 시작된 지는 오래다. 여자들은 곳곳에서 수류탄을 터뜨리며 남자들이 구축해놓은 진지를 파괴해왔다. 그 결과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이 약진하고 있다.

정치·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는 한편 남자들의 폭력에 짓눌렸던 여자들은 정당방위에서 한걸음 나아가 반격의 고삐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남성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의 보루였던 금녀의 영역은 이제 한 뼘도 채 남지 않았다.

1월8일 오전 공군사관학교 212비행대대. 국내 첫 여성 전투조종사의 꿈을 안고 입학한 49기 여생도 7명이 전투기 앞에서 언론사 사진 촬영에 응했다. 홍보성이 강하다. ‘우리는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이런 ‘생색내기’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집단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여성을 얼마나 받아들이는가’가 그 집단의 개방성과 선진성을 재는 잣대가 된 것이다.

▼금녀의 영역은 없어지는가▼

해군이 여군을 받아들인 것은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다. 미신과 함정 근무의 특수성 탓에 해군은 대표적인 금녀의 세계였다. 그러나 지금 진해 옥포 등지에 있는 해군 정비창에선 함정 개조작업이 한창이다. 올해부터 여군이 승선할 것에 대비해 화장실과 세면장, 침실 등을 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1998년 21명으로 출발한 여사관생도는 현재 61명에 이른다. 해군은 턱을 더욱 낮춰 올해엔 여학사장교, 2003년엔 여하사관까지 임용할 예정이다. 잠수함을 제외한 모든 함정에 여군을 배치한다는 원칙을 세웠다.이처럼 여성이 남성 영역의 대부분을 ‘침범’함으로써 생물학적 차이에 의한 성 역할 구분은 그 의미를 잃고 있다.

여권론자들은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 주도권을 쥐게 된 남성들이 생물학적 성 차이를 악용해 사회적 성을 조작했다고 생각한다. 여성학에서는 생물학적 성을 섹스(sex)로, 사회적 성은 젠더(gender)로 구분한다. 여성계에서 주로 문제 삼는 것은 젠더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사회적으로 구조화하는 젠더가 남성 지배/여성 억압 구도를 합리화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것,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feminism)의 기본이다.

국어사전에 정의된 페미니즘이란 여성의 사회·정치·법률상의 권리 확장을 주장하는 주의다. 남녀 동권주의로도 해석되는데, 여성학계에선 여성해방주의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서구에서 발전한 페미니즘 이론은 시대나 지역 또는 이념이나 운동방식에 따라 몇 갈래로 나뉜다.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급진주의, 포스트모던, 생태주의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여성차별을 철폐하고 남성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여성의 권익을 추구하고 남녀평등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데선 차이가 없다.

그간 한국 여성운동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근간을 이루는 가운데, 여성의 가사노동 해방과 경제력 확보를 여성해방의 절대조건으로 삼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 뒤섞인 양상을 보여왔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서 여성 차별 철폐와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를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들어 여성을 보호하는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한편 가정폭력 성폭력 등 남성의 폭력을 견제하고 응징하는 법을 강화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익을 증진시켜 왔다. ‘매맞는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것은 이제 죄가 아니다.최근 여성운동이 거둔 결실은 여성단체협의회, 여성민우회, 여성단체연합, 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들의 눈부신 활약과 김대중 정부의 의욕적인 여성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1999년 7월에 시행된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은 법과 정책집행에서의 여성 차별을 제도적으로 막고 성희롱 피해자를 신속히 구제하는 법률이다. 그해 2월 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내 성희롱 방지 및 간접차별에 관한 금지조항을 담고 있다.

정부는 또 여성의 경제활동을 권장하는 법제를 신설하고 관련 행사도 열고 있다. ‘여성기업지원에 관한 법률’ ‘여성가장채용 장려금제도’ ‘여성창업·여성기업박람회’ 등이 그것이다.

또한 ‘여성채용목표제’를 확대,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여성채용비율을 20%로 높였다. 청와대 여성특별위원회 정책담당관실 관계자에 따르면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는 여성채용과 관련해 일종의 할당제가 적용되고 있다.

목표치는 25%. 이 관계자는 “여성 참여 확대 차원에서 각 기관에 목표율을 정해준 것”이라며 “목표 미달 기관은 대통령에게 보고하게 돼 있다”고 밝혔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한 대책도 강화됐다.

1998년 1월부터 시행된 개정 성폭력특별법은 비록 친고죄 규정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13세 미만의 미성년자 성폭력에 대해 가중처벌하고 친고죄 규정에 얽매이지 않게 하는 등 법규를 강화했다. 1999년 7월1일부터는 가정폭력특례법이 시행돼 여성 인권보장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는 가정폭력을 ‘가정의 문제’로 치부해 피해자가 신고를 해도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제3자 신고 의무, 경찰관의 즉시 출동 및 검사의 즉시 조사 의무 등을 규정했다.

법제 측면으로만 보면 의미 있는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난해 UNDP (유엔개발회의)가 발표한 각국의 여성권한척도(GEM)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조사 대상 70개국 중 63위로 나타나 여성의 인권이 여전히 낙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고 판단하고 있는 여성계는 2월 중 신설될 여성부에 기대를 걸고 있다.

▼안티미스코리아 축제▼

자유주의 페미니즘 투쟁은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 차별을 개선하는 데는 상당한 공을 세웠지만 남녀 불평등의 근본 원인에 대해선 눈감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남성이 만든 모든 제도와 사회질서의 합리성을 인정하지 않는 급진적 페미니즘은 “남성이 가진 권력을 변화시키기보다는 공유하려 한다”며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이런 시각을 가진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억압의 뿌리를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임신 출산 등)과 가부장제에서 찾는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철폐될 때 여성해방이 이뤄진다고 믿는 이들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력한 투쟁을 부르짖는다.

이에 비해 포스트모던 여성해방론자들은 일종의 문화운동을 펼친다. 여성적 글쓰기, 여성성 드러내기, 전통적 여성성 해체, 여성의 다양성 등을 중시하는 그들은 여성의 참된 욕망을 표출하고 새로운 여성문화를 창조하는 데서 여성해방을 꿈꾼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여성운동은 급진적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혼재된 것으로 보인다.

호주제 폐지 운동, 부모 성 같이 쓰기 운동, 안티미스코리아 축제, 월경 페스티벌 등이 대표적인 이슈다.

1월2일 오후 2시30분. 서울 연지동 기독교연합회관 8층에 있는 계간지 ‘if’ 사무실. ‘if’는 제호 앞에 붙은 ‘페미니스트 저널’이라는 말 그대로 여성해방을 꿈꾸는 잡지다. ‘웃자 뒤집자 놀자!’라는 표어에서 이 잡지가 여성문화운동을 표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f’ 2000년 겨울호의 머리기사는 ‘가부장제와의 전면전’.

편집장인 황오금희씨(33)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영 페미니스트의 기수로 불리는 ‘if’ 창간호가 나온 것은 1997년 여름. 창간호 으뜸 기사는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이었다. 이후 ‘오르가즘을 찾아서’ ‘solo가 좋다’ 등 도발적 제목을 표지에 내걸며 눈길을 끌었다. 황오씨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 영 페미니스트들이 출현한 것은 90년대 중반 이후다.

이전까지의 여성운동이 가족법 개정이나 노동환경 개선, 정치 참여 확대 등 제도권 안에서 여성의 사회활동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신여성운동은 일상 삶에서 여성 개인의 억압에 눈을 돌린다.

이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슬로건을 내걸었고, 성범죄를 비롯한 여러 유형의 남성 폭력을 공적인 이슈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아울러 여성을 억누르는 남성 중심 문화에 반기를 들었다.

1999년 5월 ‘if’가 주관하는 제1회 안티미스코리아 축제가 열렸다. 행사 취지는 ‘미의 획일화’를 강요하고 ‘여성의 상품화’를 부추기는 미스코리아 대회에 반대한다는 것. 이 행사엔 팔순의 할머니, 뚱뚱한 주부, 심지어 남자 대학생까지 출전해 화제가 됐다. 지난해 열린 2회 대회는 ‘If You Are Free Size’라는 표어를 내세워 우리 사회의 몸매 차별을 문제 삼았다. 황오씨는 이와 관련, “(안티미스코리아) 당선 기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한 당당함”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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