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돈줄이 막혔다]P社 자금부 차장의 하루

  • 입력 2000년 12월 6일 18시 45분


6일 오전 6시30분. 50대 그룹 계열사 P사의 자금부 박모 차장(45)은 서울 을지로에 있는 은행회관에 도착했다. 벌써 1주일째다. 건너편 명동성당엔 새벽 미사를 보러 가는 신자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뿌연 새벽안개 속을 헤매며 이곳을 찾는 것은 주거래은행 이모 여신담당부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은행회관의 헬스센터에서 그가 아침마다 운동을 하기 때문.

박차장은 이부장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부장님, 이번 한번이면 더 이상 아쉬운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글쎄, 몇 번 말해야 합니까. 곤란합니다. 내 목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P사는 연초까지만 해도 자금 걱정을 별로 하지 않던 우량 제조업체였다. 국제거래도 많아 해외에서도 꽤 이름이 난 회사다. 하지만 5개월 전부터 거래업체들이 어려워지면서 받을 돈을 못 받았다. 그러면서 P사의 자금줄도 말라들기 시작했다. 하반기 들어 은행은 물론 2금융권의 대출창구가 완전히 막혀버렸다.

‘헬스장 읍소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박차장은 평소 거래관계가 있는 B은행을 찾았다. 오전 9시30분이다. 은행업무 시작시간이라 평소에는 피하는 시간대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 발행한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고 재발행(차환)이 불가능해져 당장 90억원을 마련해야 한다.

“금리는 얼마든지 감수할 테니 한번 봐주십시오.”

2시간 이상을 은행 담당자들에게 매달려 ‘하소연 반 넋두리 반’을 늘어놓았지만 결과는 신통찮았다. 그를 더욱 낙담시킨 건 은행 담당자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안면으로 자금을 빌려 줍니까. 한번 찍히면 끝인데….”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11시30분쯤 은행문을 나와 재빨리 전화를 했다. ‘꺾기’(양건예금)만 해주면 대출이 어렵지 않게 되는 것으로 알려진 C은행을 떠올렸다. 담당과장에게 점심을 같이하자고 말했다. 점심 약속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눈치지만 식사 약속도 받아내지 못했다.

결국 박차장은 명동에서 혼자 쪼그리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 오후 1시에 맞춰 종금사로 향했다. 기업여신담당 부장은 자리에 없었다. 한참 후에 들어온 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이런 곳에서 자금담당자가 오래 기다리면 자금불량 리스트에 오르는 것 모르세요?” 남의 속을 이렇게 모를 수가…. 이번에 자금을 빌려주면 내년 1월 관계회사 자금을 한시적으로 예치하겠다는 이른바 ‘바터’ 조건도 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명동 사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후 3시가 넘었다.

평소 안면이 있는 몇몇 전주(錢主)를 찾아보았으나 그중 4명은 명동에서 철수를 한 지 오래됐다는 말만 들었다. 겨우 2명의 사채업자를 만날 수 있었다.

“요즘은 우량 기업 어음할인만 하는 정도”라며 그들도 고개를 내젓는다.

4시간여 돌아다녔지만 회사에 보고할 희망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오후 8시쯤 회사로 차를 몰았다. 라디오에서 하필이면 옛 노래 ‘울고 싶어라’가 구성지게 흘러나왔다.

<김동원기자>davi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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