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웃겨야 산다가 좌우명, 못 웃기면 머리를 박았다”

  • 주간동아
  • 입력 2021년 6월 12일 1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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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학자’ 서민 “정치가 날 짓누르지만, 답답함 대변할 책임 느껴”

서민 단국대 의과대학 기생충학과 교수가 6월 4일 서울 중구 한 사무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홍중식]
서민 단국대 의과대학 기생충학과 교수가 6월 4일 서울 중구 한 사무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홍중식]


학창 시절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고 친구도 없었다. 서민 단국대 의과대학 기생충학과 교수 이야기다. 서 교수는 “친구를 사귀고 싶었지만 동시에 남들이 초라한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다. 두 감정이 매일 충돌했다”고 말했다. 그가 찾은 탈출구는 유머였다.

“웃긴 친구들이 하는 말을 책에 써놨다 집에 가서 연습했다. 초등학생이 웃기면 얼마나 웃기겠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었다. 준비한 유머가 통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시 너무 절박했기 때문에 이를 이겨냈다.”

지금은 삶이 180도 바뀌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 언론사 칼럼은 물론,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만 6개에 달한다. 파격적 형식의 글로 많은 이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서 교수는 “일부러 그렇게 쓰려던 게 아니다. 글을 독학한 탓이다. 글에 ‘야성(野性)’이 있다고도 하는데, 달리 보면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6월 4일 서울 중구 한 사무실에서 만난 서 교수는 유튜브 촬영을 방금 마친 상태였다. 그는 유튜브에서 ‘광대’ 혹은 ‘현자’로 불린다며 “광대로 불리는 게 훨씬 기분 좋다. 한 번쯤 현자로 불리는 것도 괜찮긴 하더라. 덕분에 현자로 여겨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이 단일한 인격체가 아니더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도 그렇지 않나”라며 웃었다.

별명이 다양하다. 어떻게 불렸으면 하나.

“기생충학자가 제일 좋다. 회소 분야에 들어선 덕에 사회적 발언을 하기에 유리했다. 내과로 진로를 정했다면 전문가가 되기 쉽지 않았을 거다.”

“교수 되기 쉽다기에…”


기생충학으로 진로를 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예전에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같은 질문을 받으면 과학 발전을 위해 기생충학에 뛰어들었다고 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교수가 되기 쉽다기에 진로를 이쪽으로 정했다. 과거 담당 교수가 ‘대변검사 하는 곳 아니다. 교수직도 많이 비었다’며 권했다. 단국대 교수 임용 때 경쟁률이 1 대 1이었다. 보통 의대 교수 경쟁률은 8~10 대 1 정도다.”

솔직해야 한다는 강박도 느껴진다.

“달리 보여줄 게 없다. 진중권 전 교수가 제일 부러운 지점도 미학을 잘 아는 거다. 비트겐슈타인 이야기하면 멋있지 않나. 글을 쓰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나는 그게 없다. 예전에 강준만 교수 책을 읽고 있으면 주변에서 이런 한심한 책 읽지 말고 자본론 읽어라, 슈테판 츠바이크 책 읽어라 간섭하더라. 억지로 읽느라 힘들었다. 괜한 참견이다.”

글쓰기 공부를 어떻게 했나.

“20년 넘게 개인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글쓰기 연습을 위해 개설했다. 가족사를 포함해 적나라한 글을 너무 많이 썼다.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남이 볼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당시만 해도 논란을 일으키면 사람들이 싸이월드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털었다. 이 글들이 걸리면 큰일 나겠다 싶어 네이버 블로그를 미끼로 만들었다. 본진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글의 일부만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다. SNS 대신 네이버 블로그를 선택한 이유도 사람들에게 글을 덜 보이고 싶어서다.”

관심받는 걸 좋아하지 않았나.

“유명해지면 행동에 제약이 많다. 내가 바르게 사는 사람이 아니다. 조용히 살려고 했다. 진 전 교수가 ‘대깨문 감별법’이라는 글을 SNS에 링크하면서 블로그가 유명해졌다. 모든 게 바뀌었다. 대충 글을 써도 기사로 나오더라. 대형 커뮤니티에 진 전 교수와 교대로 최다 추천을 받은 글로 기록되는 호사도 누렸다. 블로그 방문객이 늘어나니까 사람 마음이 변하더라. 기분이 좋았다.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관종(관심을 즐기는 사람)의 마음이 더 컸다.”

“2004년 이후 우울한 적 없다”


서민 교수가 6월 4일 서울 중구 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유머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중식]
서민 교수가 6월 4일 서울 중구 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유머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중식]


2005년 ‘한겨레’에 칼럼니스트로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 내 인생 5번째 ‘망작’을 출간했다.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인데 처참하게 망했다. 지금도 내 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 편의 논문에 근거해 헬리코박터가 나쁜 균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훗날 틀린 사실로 밝혀졌다. 학자 시각에서 볼 때 기본이 안 된 책이었다. 한겨레 담당자는 해롭게 여겨지는 존재에 대해 변명하는 태도를 인상 깊어 했다. 같은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봐달라고 부탁했는데 실패했다. 1년간 글을 쓰고 조기 하차했다.”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나.

“글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 보니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글만 나왔다. 재미라는 것이 글을 더 잘 읽히도록 하기 위한 수단 아닌가. 내 글은 시종일관 재미가 목적이었다. 옛날부터 웃긴 사람을 목표로 하다 보니 무리한 시도를 많이 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웃기지도 못했다. ‘신문에 이런 칼럼이 실리다니 놀랍다’며 어이없어 하는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유머는 삶의 모토다. 1995년 ‘사랑의 스튜디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좌우명을 묻기에 ‘웃겨야 산다’라고 답했더니 흥미를 갖더라.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좌우명은 같다. 친구를 사귈 목적으로 시작했는데 결국 유머가 삶 자체가 됐다. 강박까지 느꼈다. 남이 웃긴 말을 해도 웃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심을 느낀다. 한때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남을 못 웃기면 벽에다 머리를 찧곤 했다. 지금은 마음을 내려놨다”고 덧붙였다.

살면서 울적한 적은 없었나.

“2004년 이후로 우울한 적이 없었다.”

2004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

“1999년 결혼 생활에 실패한 후 방황했다. 스스로를 인생 실패자라고 여겼다. 어느 순간 행복해지더라. 지옥에서 벗어났는데, 이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지옥을 맛본 사람은 현생의 행복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여러 사람을 만나며 술을 많이 마셨다. ‘내가 이만큼 잘나간다’고 남들에게 보여주고도 싶었다. 향락이 지나쳐 몸만 축났다. 2006년부터 연구에 열중했다. 2년 후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고, 더는 불만이 없다. 강아지들을 위해 로또를 매주 사긴 한다.”

서 교수의 강아지 사랑은 각별하다. 현재 총 6마리의 페키니즈를 키우고 있다. 그의 네이버 메일 아이디는 bbbneji, 다음 메일 아이디는 bbbbbenji이다. 18년을 키운 몰티즈의 이름 ‘벤지’에서 따왔다.

“옛날 외롭던 시절 나를 많이 도와준 강아지였다. 여동생 대학 합격 선물로 어머니가 사줬는데, 그 녀석이 온 날 방학이기도 해 일주일간 집을 나가지 않았다. 이후로도 앞에 앉혀놓고 술을 마시곤 했다. 네이버가 생겨 아이디를 benji로 하려 했는데 이미 누군가 만들었더라. b를 하나 더 넣었는데도 있었다. 결국 bbbenji가 됐다. 다음 메일은 b가 4개까지 있었다. 변태가 많다.”

“개가 사람 대신할 수 없다”


사람보다 개가 더 편하지 않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제일 좋다. 어릴 적 친구가 없었던 게 한이 돼 친구 사귀기에 열중했다. 어느 순간 친구가 너무 많아져 문제였다. 친구 만나느라 한 해가 다 갔다. 그 안에서 상처받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했다. 개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사람을 대신할 순 없다.”

주변 지인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석에서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정치 이야기는 짜증만 난다. 요즘 정치가 나를 짓누르고 있다. 정치적 삶을 사는 건 참 피곤하다. 주말에도 뉴스를 챙겨야 한다.”

정치적 삶을 포기하고 싶진 않나.

“대학교수라 언행에 제약이 적다. 나로 인해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대신 속 시원히 말해줄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인터뷰 중 진 전 교수의 이름이 유독 많이 등장했다. 진 전 교수는 4월 9일 페이스북에 “(서 교수가) 이제 선동가가 다 됐다. 서민 교수와는 같이 갈 수 없겠다. 수차례 고언을 드려도 멈추지 않는다면 할 수 없다”는 글을 남겼다. 서 교수는 “실망시켜 드려 죄송하다. 나를 내치지 않고 조국흑서 저자의 일원으로 대접해줘 고맙다”고 응답했다.

“서운하지 않냐”는 기자의 물음에 서 교수는 “그 일이 있기 전에도 연락은 따로 안 했다. 삶에 큰 변화가 있지 않았다. 주변에서 위로를 하는데,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헤어졌으면 그걸로 된 거다”라고 무심한 듯 답했다.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93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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