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긴, 시중쉰, 그리고 박봉주[우아한 청년 발언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7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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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북한 노동신문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이며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인 박봉주동지가 황해남도의 태풍 피해 복구 정형을 현지에서 료해하였다”고 밝혔다. (사진/노동신문 캡처)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 노동신문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이며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인 박봉주동지가 황해남도의 태풍 피해 복구 정형을 현지에서 료해하였다”고 밝혔다. (사진/노동신문 캡처) photo@newsis.com
손세호 서울대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
손세호 서울대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
지난달 30일 북한 노동신문 1면에 박봉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과 김덕훈 내각총리가 나란히 실렸다. 노동신문 1면은 김씨일가를 위한 독점 코너라는 점에서, 북한 전문가들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는 해석을 내고 있다. 김정은이 자신의 ‘성역’을 경제 관료들에게 내어준 이유는 무엇일까.

각 분야별로 권한을 나눠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북한 정권의 권력동학이 우선 주목된다. 국정원은 ‘위임통치’라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했으나, 통일부 및 다수의 북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조하면 ‘역할분담’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김일성·김정일만 대두되던 독주 체제에 비해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중대한 고민은 바로 형평성의 대가로 희생한 효율성이다. 경제학자 버그슨에 따르면, 사회주의 경제의 효율성은 자본주의 경제에 비해 25~34%나 떨어진다. 평생 사회주의를 연구한 헝가리의 경제학자 야노시 코르나이의 표현대로 사회주의에서는 경제가 정치에 종속되어 있고, 경제적 의사결정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에 따라 생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 고삐를 조금씩 풀어줘서 경제성장을 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생기게 된다. 생산 결정을 비전문적인 이데올로그 대신, 프로페셔널에 맡겨볼까 하는 것이다. 김정은도 역시 이런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박 부위원장과 김 총리는 현재 북한 경제의 투톱이다. 노동신문 1면은 이들에게 더 많은 힘을 주었다는 증표라고 판단된다.

박봉주는 아마 북한 내에서 시장경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시장으로의 개혁 성과가 나곤 했으나 그만큼 많은 견제에 부딪쳤다. 그의 일생에 대해 ‘북한 경제의 질곡’이라는 표현도 나왔다. 2002년 7·1경제관리 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도입의 성과가 부진하자 내각 총리에 등용된 박봉주의 전성기는 2005년까지였다. 시장에 적대적인 북한 보수 세력의 반발이 심했던 것이다. 2007년 그가 기업소 지배인으로 쫓겨난 후, 2009년 김정일은 화폐개혁 실패에 따른 반발과 –3%대의 저조한 성장률을 지켜봐야만 했다. 비상과 추락을 반복했던 그의 ‘인생 그래프’는 북한 경제의 변곡점과 유사하다. 박봉주와 북한 경제는 ‘시장’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민 생활을 향상해야 한다’는 전통적 프로파간다를 다시 내걸고 있는 김정은도 대북제재와 코로나, 자연재해 한가운데서 쪼그라드는 경제를 보며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선대의 경험을 상기하며 경제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후인 2013년, 박봉주는 다시 내각총리가 됐다. 그리고 이번에는 노동신문의 머리기사로 본격적인 무대에 화려하게 올랐다. 박봉주는 과연 김정은의 기대에 부응하여 북한 경제를 번영의 길로 이끌 수 있을까.

사회주의의 어려움과 고민을 먼저 안았던 소련과 중국도 지금의 북한처럼 효율성 저하에 시달렸다. 경제개혁은 필수였다. 그러나 양국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갔다. 소련은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의 보완을 기획했고, 자본주의의 요소들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중국 역시 처음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나, 사실상 시장경제가 될 만큼의 적극적 조치들을 단행했다. 소련의 코시긴과 중국의 시중쉰은 양국의 상이한 개혁정책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코시긴의 소련의 총리였다. 그는 경공업 담당 장관과 계획경제를 관리하는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의 위원장을 지낸 경제 전문가였다. 1964년 흐루쇼프 축출 후, 코시긴은 당서기인 브레즈네프와 함께 권좌에 올라 경제정책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 소련 경제는 상당히 침체되어 있었다. 코시긴은 1965년에 경제개혁을 시작한다. 경제활동 전반의 한도가 여전히 잔존했다는 문제가 있었으나, 이윤을 허락하는 등 기업들의 자율성을 강화하고 성과급까지 지급했다.

하지만 최고권력자였던 브레즈네프가 1969년 소련 중앙위원회에서 코시긴의 개혁조치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한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의 여파로 인한 정치적 좌경화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에 대한 정치 우위의 논리에 권력투쟁까지 맞물렸다. 1970년대 들어서 소련 경제는 개혁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고 만다.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시중쉰은 광둥성의 개혁파 지도자였다. 정치학자 조영남 교수에 따르면, 시중쉰은 낙후된 선전시를 인접해 있는 홍콩과 연계시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을 했다고 한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시중쉰은 중앙에 선전시를 농·공업 특구로 발전시키겠다는 계획을 보고했고, 국무원은 광둥시의 결정을 그대로 승인했다. 추후 가공무역 지대와 세율 인하 등 허용 요구에 덩샤오핑은 ‘특수한 정책’을 허락한다며 긍정적으로 답했다. 경제특구로 지정된 선전시는 1980년 이후 5년간 매년 평균적으로 50%의 성장을 했다.

선전시의 눈부신 발전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절대 아니다. 특혜를 받지 못한 다른 지역의 시기와 질투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덩샤오핑의 지원이었다고 조영남 교수는 밝히고 있다. 1981년의 밀수 사건 때 보수파들은 ‘특구는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며 선전시를 거세게 비판했다. 이 상황에서 덩샤오핑은 선전시를 방문해서 ‘경제특구는 중앙이 결정한 것이다’라며 힘을 실어줬다. 밀수에 대한 문제는 개혁의 중단으로 전이되지 않고, 간부들의 뇌물수수 등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적확한 대처였다. 1984년 공산당은 '도시 경제체제 개혁 결정'을 채택해 자본주의로의 가속페달을 밟는다.

양국의 이질적 경제개혁이 빚은 결과는 유의미하게 달랐다. 소련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추계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2.4%, 1980년대의 첫 번째 5년에는 1.7%, 두 번째에는 1.3%에 그쳤을 뿐이다. 반면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9.6%에 달하는 고속 성장을 했다. 결정적으로 정치적 운명이 달라졌다. 모두가 알다시피, 소련 공산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이나 중국 공산당은 아직도 집권하고 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체제는 국민들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련과 중국의 경험이 김정은에게도 답을 준 것 같다. 사회주의에 시장메커니즘을 도입하는 개혁은 일관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혁을 주도하는 관료보다도, 포괄적 경제개혁에 대한 최고권력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코시긴의 실패는 브레즈네프 탓이 크고, 시중쉰의 성공은 덩샤오핑 덕분이다. 중국의 성공은 경제부문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 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정책들로 만들어진 강력한 보완성과 함께, 중앙정치의 지원사격으로 완성된 것이다.

개혁과정에서 걸림돌들은 항상 있었다. 박봉주가 당한 것처럼 코시긴과 시중쉰 모두 이데올로그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최고권력자들은 시장의 확대가 권력약화로 연결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이념과 통제가 핵심 정책기제인 사회주의 정권에게는 이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쉽지 않다.

김정은은 작년 말부터 '정면돌파'를 강조하면서 시장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계획경제를 연상시키는 통제를 들고 나왔다. 핵개발의 반대급부로 국제사회의 압박을 받은 상황,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는 이념의 강조와 강박적 통제를 통해 내부결속을 다져야 한다는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프라하의 봄을 위기로 인식한 소련 당국이 국내 경제개혁까지도 뒤집음으로써 더 심각한 경제위기를 초래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만성적 경제난에 시달리던 소련은 결국 손쓸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정치적으로도 붕괴되고 말았다.

성장을 위한 경제개혁에서 전문가 기용은 필요조건일 뿐이다. 아무리 유능한 경제 관료에게 맡긴다고 해도, 그가 뛸 수 있는 필드가 열악하다면 개혁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북한 경제 발전의 키(key)는 박봉주가 아니라 여전히 김정은이 쥐고 있는 셈이다. 소련이 아니라 중국의 길을 가고 싶다면, 김정은은 온갖 반발과 유혹, 고민의 걸림돌들을 이겨내고 전면적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많이 흔들린 것 같지만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사회주의 정권이 살아남는 방법은 사회주의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손세호 서울대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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