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이산가족 상봉 당시, 장씨는 꿈에만 그리던 형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온갖 선물을 바리바리 들고 갔다. 적십자로부터 북에 가져갈 수 있는 선물 무게가 30㎏에서 20㎏으로 줄었다는 말에 준비했던 방한복, 화장품, 상비약 등을 최대한 여행가방 5개에 꾹꾹 눌러 담았다. 혹시 몰라 조카를 위해서도 크레파스, 색연필, 볼펜까지 챙겼다.
“형님 건강을 위해 2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의 인삼진액과 전자 배터리가 필요 없는 오토매틱 시계도 준비했다”며 꼼꼼하게 신경 썼던 그때를 회상했다.
하지만 그의 형이 장씨를 위해 들고 온 선물은 고작 술 두 병이 전부였다.
“북한 체제 선전만 하더라고.”
장씨는 상봉에서의 남은 시간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중에라도 형에게 생필품을 보내주기 위해 형의 집 주소를 물었다. 하지만 형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끝내 정확한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북에선 세금도 없다. 먹을 것, 지낼 곳 모두 나라에서 다 지원한다. 교육도, 의료도 모두 공짜”라며 앵무새 같이 체제 선전만 반복했을 뿐이다.
장씨는 “재상봉을 한다면 그 땐 속 시원하게 터놓고 이야기 하고 싶다. 이북의 감시와 체제선전 때문에 서로 할 말도 제대로 못했었다”며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다.
장씨는 1950년 당시 북한 땅이었던 양양군 속초읍 논산리, 현재 속초시 조양동에서 살았다. 통신시설이 없다보니 전쟁이 발발한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하는 군대를 피해 17살이었던 형은 “며칠만 갔다 내려오겠다”는 한마디만 남긴 채 어머니와 13살이었던 동생을 두고 중학교 담임선생님을 따라 북으로 피난했다.
1·4 후퇴 때 동네사람들이 돌아왔지만 형과 담임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행기가 피난행렬을 공습하면서 죽었을 거라고 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2년 전 이북에 있는 형님이 살아계신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70년 만에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감격적인 만남을 이룰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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