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앞은 안보여도 꿈을 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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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은 안보여도 꿈을 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시각장애-뇌병변 딛고 탈북… 가수 꿈 키우는 박혁 군

박혁 군은 서울 한빛맹학교에서 처음으로 정규 장애인 교육을 받으며 가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 왼쪽은 한글도 못 쓰던 박 군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원어민 영어교사 소냐 김 씨.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박혁 군은 서울 한빛맹학교에서 처음으로 정규 장애인 교육을 받으며 가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 왼쪽은 한글도 못 쓰던 박 군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원어민 영어교사 소냐 김 씨.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두만강 물속으로 혁이(19·2005년 탈북 당시 12세)는 조심스레 첫발을 내디뎠다. 해가 떨어진 뒤로 내내 비가 내린 탓에 강물 위로 안개까지 뿌옇게 끼어 있었다. 5월 봄 날씨라지만 북한과 중국을 가르는 강물은 여전히 차가웠다. 두 다리를 모두 물속에 담그자 순간 물살에 몸 전체가 휘청거렸다. 9년 전 먼저 탈북에 성공한 아버지(53)가 ‘믿고 따라오라’며 보내준 북한 브로커는 이미 성큼성큼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어머니(52)와 누나(24)도 강물 속으로 몸을 내맡겼다. 혁이라고 더 이상 주춤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
○ 엄마와 함께 남한으로

용기를 내어 몇 걸음 더 걸어갔을까, 갑자기 강바닥이 푹 꺼졌다. 며칠 전부터 연일 내린 비에 강물은 생각보다 불어나 있었다. 강물은 어느덧 키 120cm인 혁이의 어깨 너머 높이까지 올라왔다. ‘절대 큰 소리를 내어선 안 된다’던 브로커의 당부사항도 잊은 채 겁에 질린 혁이는 순간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발이 바닥에 닿질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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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이는 어려서부터 옥수수와 감자 말고는 먹어본 음식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또래보다 30cm 이상 작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시각장애 1급)이기도 했다. 왼쪽 뇌가 쭈그러든 뇌병변장애 1급이라 오른쪽 팔과 다리도 쓰지 못했다.

앞장서 강을 건너던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다급한 부름에 그대로 뒷걸음질쳐 돌아왔다. 몸이 불편하다고 봐주는 것 없이 다른 형제보다 더 엄하게 혁이를 가르쳤던 엄마는 어느새 혁이 앞에 등을 내밀었다. “어서 업히거라.” 도움 받기를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혁이도 순간 어린아이처럼 엄마 등에 올라탔다. “무섭지? 엄마도 많이 무서워. 엄마 등만 꼭 붙잡고 있어. 이 강만 건너면 아빠 만날 수 있대.” 그렇게 업고 업힌 채로 모자는 한 시간 넘게 두만강을 건넜다.

○ “학교에 가고 싶어요”

2006년 탈북 직후 하나원 적응 생활 시절 아버지와 만난 박혁 군. 박혁 군 제공
2006년 탈북 직후 하나원 적응 생활 시절 아버지와 만난 박혁 군. 박혁 군 제공
함남 홍원군 인근 작은 마을에서 혁이네는 벼와 옥수수,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혁이 부모님은 물론이고 누나, 형(21)까지 꼬박 하루 종일 일했지만 늘 배를 곯기 일쑤였다. 옥수수가 주식이었고 그마저도 부족할 때는 감자를 삶아 밥 대신 먹었다. 혁이 가족이 탈북을 결심한 건 비단 배고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혁이의 미래도 큰 이유였다.

혁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발육이 늦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생후 1개월이 됐을 무렵이었다. 여느 아이와 달리 도통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다른 아기들은 실컷 뒤집고 기어 다닐 나이에 혁이는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고만 다녔다. 오른쪽 팔도 펴지 못했다.

장애가 있어도 밝고 붙임성이 좋던 혁이는 7세가 되던 해 자기도 형, 누나처럼 학교에 보내달라고 매일 엄마를 졸랐다. 북한 사정상 장애인 특수교육을 기대할 수는 없었기에 엄마는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혁이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엄마는 입학원서를 내러 큰마음 먹고 학교에 갔다. 엄마 손을 잡고 온 혁이를 보고 학교 아이들은 “눈깔 병신이 왔다”고 깔깔댔다.

나날이 심해지는 괴롭힘에 씩씩했던 혁이도 결국 학교를 나가지 못했다. 놀림도 싫었지만 시각장애인인 혁이가 일반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혁이의 시력으로는 10cm 정도 앞에 놓인 글씨밖에 읽을 수 없었다. 칠판에 쓴 선생님의 판서는 아무리 가까이 가더라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상에 코를 박고 글씨를 쓰려다 보니 다른 친구들이 한 문장을 쓰는 동안 한 글자 쓰는 일도 어려웠다. 오른손이 불편해 억지로 왼손으로 생활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렸을 때는 몰랐던 장애인으로서의 좌절감이 학교 입학 이후 도리어 더 커졌다. 친구들이 미워서, 학교 수업을 못 따라가서 하루 이틀씩 수업을 빠졌고 학교에 가는 날보다 안 가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학교 선생님 대신 다섯 살 위인 누나가 혁이를 돌보며 한글과 셈을 가르쳤다. 매일 아침 남매는 산에 올라 나물을 캐고 땔감을 찾으며 한글 노래를 불렀다. 그게 장애인으로서 혁이가 북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교육이었다. 척박한 북한 땅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아들이 불편한 몸과 보이지 않는 시력으로 평생 농사를 짓고 고생해야 한다는 현실을 어머니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마침 동네에서 몰래 보던 남한 TV 프로그램에서는 어떤 병도 뚝딱뚝딱 잘 고쳐내는 남한의 유능한 의료시설들이 소개됐다. ‘남한에 가면 혁이가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남들처럼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생각만으로 어머니는 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목숨을 건 탈북을 결심했다.

○ 사막길 건너고 철조망 넘어

중국 지린(吉林) 성에서 학교를 다니던 큰아들과 함께 먼저 탈북에 성공한 혁이 아버지는 부인의 전화를 받고 며칠 뒤 탈북 전문 브로커를 고향 집으로 보냈다. 예고도 없이 밤 12시 갑자기 찾아온 브로커는 ‘마을 밖에 차를 대놨으니 서두르라’며 혁이와 어머니, 누나를 재촉했다. 세 식구는 갈아입을 옷 한 벌 못 챙긴 채 차를 타고 그 길로 그날 밤 국경에 도착했다. 몸이 불편해 마을 밖 친척집에도 가본 적이 없었던 혁이에겐 첫 ‘여행’이었다. (혁이는 아찔했던 탈북 과정을 지금도 ‘추억’이라고 부른다.)

돈으로 매수한 국경경비대원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두만강을 건넌 세 식구는 중국인 브로커를 따라 중국 네이멍구 지역으로 이동했다. 차를 타다 걷다를 반복하기를 꼬박 일주일. 사막 길을 걷는 내내 누나와 엄마가 번갈아 가며 혁이를 업었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워낙 거세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빵과 염소젖은 꺼내는 순간 모래에 뒤덮여 시커멓게 변했다. 두 사람이 인간 벽을 세워 바람을 잠깐 막는 사이 입에 음식을 재빨리 넣는 것이 그들의 식사법이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도착한 몽골 국경에는 허술한 철조망이 있었다. 철조망을 직접 손으로 벌려 세 사람은 함께 국경을 넘었다.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이었다. 몽골 국경경비대 난민수용소에는 이미 수백 명의 탈북자가 한국 대사관으로 인계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66m²(20평) 남짓한 방에 남녀 탈북자 50명이 뒤섞여 생활했다. 혁이네도 두 달을 기다린 끝에 2006년 4월 비행기를 타고 한국 땅을 밟았다.

○ ‘굽은 팔’ 수술 받고 싶지만


3개월간의 하나원 적응 생활을 마치고 아버지와 형이 기다리고 있는 서울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농촌 벽돌집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혁이에겐 ‘집 여러 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가 신기하기만 했다. 신기한 건 집뿐만이 아니었다. 남한에는 혁이처럼 장애인을 위한 교육 과정도 제대로 마련돼 있었다. 혁이의 적응 과정을 돕던 서울 공릉사회복지관에서 혁이에게 시각장애인 전문 교육 과정을 권했다. 마침 집에서 30분 거리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문학교인 한빛맹학교(교장 김양수)가 있었다.

2007년 봄 한빛맹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혁이는 난생처음 시험이라는 것을 봤다. 점자가 찍힌 종이를 익숙한 손길로 만져가며 문제를 풀던 남한 친구들과 달리 혁이는 간단한 국어와 수학 문제를 읽는 것조차 어려웠다. 결국 네 살 어린 초등학교 3학년 동생들 반에 들어갔지만 혁이는 그래도 좋았다. 남들보다 조금 뒤처졌지만 이제 혁이는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로 인사말과 자기소개도 할 줄 알게 됐다. 재미교포인 원어민 영어교사 소냐 김 씨(23·여)가 유독 혁이를 아껴준 덕분에 두렵기만 했던 영어에 자신감도 생겼다.

같은 반 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현재 중학교 2학년인 혁이는 요즘도 매일 오전 6시면 집에서 나와 남들보다 1시간 반 먼저 학교에 도착해 영어 공부를 한다.

혁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체육이다. 한빛맹학교에서는 시각장애아를 위해 굴리면 소리가 나는 특수 축구공을 사용해 연습을 한다. 시력이 조금 나은 아이들이 시각장애 1급 친구들과 손을 잡고 2인 1조 축구 경기를 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꿈도 꿔보지 못한 시간이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시각장애와 뇌병변장애는 어쩔 수 없지만 굽어버린 오른팔은 수술을 통해 펼 수도 있다고 했다. 신경까지 모두 되살리긴 어렵지만 수술을 하고 재활치료를 통해 지금보다는 편하게 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이 큰 문제다. 혁이의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엄마는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지만 수술비를 대기에는 수입이 턱없이 부족하다. 혁이는 “다리는 괜찮은데 팔은 좀 고쳤으면 좋겠다”며 “오른팔이 불편하니까 무거운 것도 못 들어 아르바이트를 못한다”고 처음으로 솔직하게 소원을 말했다.

혁이는 요즘 한국에서 가수가 되는 꿈을 꾸고 있다. 가수 신승훈이 혁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이자 롤모델이다.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우연히 본 텔레비전에서 신승훈이 기타를 치며 발라드를 부르는 모습에 반했다고 했다. 대개 신명나고 들썩이는 북한 가요 스타일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났다. 마침 얼마 전 학교 선배인 김수환 형이 SBS ‘서바이벌 오디션 K팝스타’ 프로그램에 출연해 심사위원인 가수 보아를 울리는 것을 보고 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도 제가 목소리는 미성이거든요. 가수가 되면 몸을 쓰지 않아도 되고 목소리와 진심만 있으면 남들과 공감할 수 있잖아요.”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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