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재산 환수 노린 화폐개혁 ‘시장 생명력’에 끝내 좌초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화폐개혁 왜 실패했나
상인 “새 돈 받느니 안판다”
물자 유통안돼 인플레 극심
외자 유치에도 걸림돌

北지도부 책임론 불거져
‘보수적 경제조치’ 주도한
박남기 黨재정부장 해임
‘총책’ 장성택도 입지 위축

북한이 최근 화폐개혁과 시장통제 등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복원하려는 경제 조치들을 사실상 철회하고 있다. 특히 북한이 이런 정책을 주도한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전격 해임한 것은 이 같은 경제정책의 실패를 자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부 당국자는 3일 “박 부장의 해임은 거의 확실하다”고 전했다. 박 부장은 지난해 단행한 화폐개혁과 시장통제, 외환통제 조치 등이 불러온 극심한 후유증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으로 관측된다. 가파른 인플레이션과 식량 부족, 사회 불안 등 대혼란에 대한 ‘속죄양’이 됐다는 것이다.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에서 kg당 쌀 가격은 지난해 11월 30일 단행된 화폐개혁 직후 20원에서 1월 하순 600원대로 올랐고 환율은 지난해 12월 초 달러당 30원에서 1월 하순 530원 정도로 급상승했다. 주민들 사이에는 새 화폐보다는 달러나 상품을 보유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져 시장 상인들은 상품을 내놓지 않고 주민들은 물건을 사재기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박 부장의 해임은 북한 지도부가 ‘시장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 당국이 예기치 못한 이런 상황에 매일 대책회의를 열 정도로 고민이 깊을 것”이라면서도 “실무자가 아니라 박 부장을 해임한 만큼 시장통제의 강공 드라이브는 주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 등 북한 지도부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되살린다는 목표로 화폐개혁과 시장·외환 통제라는 극약처방을 선택했다. 이를 통해 1990년대 경제난 이후 지속된 시장의 확산을 바로잡고 주민들이 감춰뒀던 돈을 국가가 강탈하는 방법으로 국가재정을 확충하려 시도했지만 결국 시장에 손을 든 것이다.

북한 당국의 정책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임강택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경제의 시장화 실태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북한은 소비재 상품부터 노동, 생산재, 부동산, 자본(금융)까지 방대한 분야에 걸쳐 시장화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시장이 공식 경제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임 연구위원은 “시장이 없이는 공식 국가경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많은 주민이 시장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지난해 북한 최대의 비공식 시장인 평성시장을 폐쇄했지만 주민들은 단속을 피해 인근 골목에서 장사를 계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화폐개혁 이후 시장의 물품 가격이 불안정해져 당장 돈이 급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상인들이 물건을 깔고 앉아 상황만 관망하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 당국에서 외화사용 금지령까지 내리면서 중국에서 식량과 물품이 들어오는 길도 막혔다. 북한 당국이 발행한 새 화폐는 가치척도로서의 기능을 거의 수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장마당에 식량과 물건이 없는 반면 사려는 사람은 많아 간혹 장마당에 나오는 식량 가격은 부르는 것이 곧 가격이 됐다. 지난달 장마당에서 쌀 가격이 수십 원에서 1000원까지 큰 폭으로 오르내린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 소식통은 “장사꾼들이 깔고 앉아있는 양을 감안하면 북한 전체적으로 식량의 절대량은 크게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러나 하룻밤이 지나면 가격이 껑충껑충 뛰는 바람에 모두 가격이 오를 때를 기다리며 내다 팔려고 하지 않아 굶주리는 사람들도 나오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서 시장 가격은 점차 적정 가격에 접근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적정가격의 기준은 화폐개혁 이전에 달러나 위안화로 환산됐던 곡물 가격이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지금은 북한 시장에서 앞으로 가격이 더 오를 것이라는 심리가 만연하고 있지만 가격이 더 오르기 힘들다는 인식이 퍼지는 어느 순간 가격 거품이 꺼질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은 반(反)시장적 경제정책이 그토록 원하는 외자 유치에도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개연성이 크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 당국이 화폐개혁 등으로 시장과 상인을 억압하는 반시장 정책을 펴는 한 해외 투자가들은 대북 투자를 망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봉현 기업은행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은 앞으로 계속해서 화폐개혁 이전의 시장 허용 정책으로 유턴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부장과 함께 북한의 보수적 정책기조를 추진해온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행보도 위축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의 관측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