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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0월 1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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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54)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가 제시하는 시대정신은 ‘평화를 통해 경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 북한에 ‘개성공단’과 같은 산업단지를 여러 개 만들면 남측의 경제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5월 펴낸 책 ‘개성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에서 “남북 경제공동체 실현은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시대의 서막이자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며 역사적 성공”이라고 주장했다. 정 후보가 이처럼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미래를 그리게 된 배경은 뭘까. 그는 18년 동안 방송사 기자를 한 뒤 43세에 정치에 입문해 열린우리당 의장과 통일부 장관 등을 거쳐 11년 만에 대선후보가 됐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력이 눈에 띄지만 그는 타고난 운명을 강조한다. 》
민청학련 옥고 뒤 기자-앵커로 명성
1996년 전국 최다득표로 정계 입문
2002년 민주당 경선 1승15패로 완주
집권당 의장-통일장관등 거치며 부침
○ 생일이 휴전협정일
정 후보가 태어난 1953년 7월 27일은 6·25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 대표와 북한 인민군 대장이 휴전협정에 서명한 날이다.
그는 15일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가?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우연하게도 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되던 날 세상에 태어난 제가 휴전체제를 평화협정 체제로 바꾸는 역사적 과업을 이루어내고 싶은 꿈이 있다고 대답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운명론’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정치 성향’의 영향이라는 게 주변 사람들의 얘기다.
정 후보는 전북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에서 구림면장과 전북도의원을 지낸 아버지 정진철(1969년 작고) 씨와 어머니 이형옥(2005년 작고) 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6·25전쟁 도중 형 4명이 모두 숨져 남동생 3명을 둔 장남이 됐다.
정 후보는 저서 ‘개나리 아저씨’에서 아버지에 대해 “전북 순창에서 중소지주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1956년 제2대 전북도의회에 진출해 예결위원장 산업경제위원장 등을 지내며 정력적인 활동으로 지방 정가의 주목을 받으셨다”고 썼다.
○ 가난과 유신반대 투쟁, 복역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은 대학 시절. 정 후보는 197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해 그 다음 해 ‘유신독재’ 반대 시위를 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돼 30일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살았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이 씨는 “아들을 망칠 수 없다”며 순창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이 씨는 당시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 뒤의 언덕 작은 집 방 한 칸에 재봉틀 몇 대를 들여 놓고 아동복 바지를 만들어 내다 팔았다. 정 후보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천과 단추를 사러 돌아다녔고, 박음질한 천을 둘러메고 청계천과 사근동 집을 오가기도 했다.
정 후보는 유신반대 운동을 계속하다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서울 서대문구치소 등에서 3개월간 복역한 뒤 군에 강제 징집됐다. 군에선 ‘악바리’로 불렸다. 보안사의 안가로 붙잡혀가 열흘간 조사를 받고 나왔는데 휴가를 다녀온 것으로 오해한 군대 고참이 집단기합을 주자, 곡괭이를 휘두르며 저항해 붙은 별명이다.
○ 삼풍백화점 붕괴현장 생중계로 인기 얻어 정계 입문
정 후보는 1995년 6월 발생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유명해졌다. 사고 현장의 인명구조 상황을 앵커 대신 장시간 생중계하면서 생생하고 유려한 현장 묘사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정 후보는 이를 눈여겨 본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권유로 1996년 4월 총선 직전 정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총선에서 전북 전주시 덕진에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됐다. 4년 뒤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에서 다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됐다.
○ 패배와 재기
정 후보는 2000년 8월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또 같은 해 12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권노갑 최고위원의 2선 퇴진을 요구해 파란을 일으켰다. 정 후보는 이게 당 ‘정풍(整風)운동’의 발단이 됐다고 자평한다.
정 후보는 여세를 몰아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노무현 후보에게 졌다. 전국 16개 지역 순회 경선에서 1승15패를 했지만 경선을 중도에 포기하진 않았다.
정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직후 “낡은 정치와 단절해야 한다”며 민주당 해체 및 신당 창당을 주장했다. 그 결과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졌고 그는 당 초대 의장이 됐다. 그러나 그가 통일부 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을 지내는 동안 민심은 실정(失政)을 일삼은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등을 돌렸다.
그는 차가운 민심을 의식해 열린우리당을 떠나 범여권의 대통합을 주창하며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었고, 대선 후보가 됐다. 5년 만에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정동영,그는 누구인가 생년월일 1953년 7월 27일(양력) 출생지, 본적, 본관 전북 순창군, 순창군, 동래 정씨 키, 몸무게, 시력 168cm, 68kg, 좌 1.0 우 1.0 혈액형 A형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제대 가족관계 부인, 2남, 형제는 본인 포함 4형제 종교 가톨릭 재산 신고액 13억466만 원 별명 악바리(군대시절) 좌우명 구동존이(求同存異·이견은 미뤄두고 의견을 같이하는 분야부터 협력한다) 존경하는 인물 백범 김구, 다산 정약용 좋아하는 노래 양희은의 ‘아침이슬’ 감명 깊게 읽은 책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 좋아하는 음식 김치찌개, 햄버거 존경하는 정치인 존 F 케네디 어린 시절의 꿈 역사학자 본인이 생각하는 장점 매사에 긍정적 본인이 생각하는 행복 소중한 사람들이 항상 건강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 학력 전주북중, 전주고,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영국 웨일스대학원 저널리즘 석사 저서 ‘개나리 아저씨’ ‘개성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중산층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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