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신건 사전영장]“국가기관 범죄… 首長에 책임”

  • 입력 2005년 11월 15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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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임동원(林東源), 신건(辛建)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은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 행위를 주도한 정부기관 수장에게 가장 무거운 책임을 묻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검찰은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두 전직 국정원장만 구속할 경우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의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과 여러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고심 끝에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정보기관 수장에 대한 구속영장=두 전직 국정원장이 혐의가 인정돼 구속영장이 발부될 경우 1997년 터진 ‘북풍(北風)’ 사건으로 권영해(權寧海) 전 안기부장이 1998년 구속된 이래 처음으로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 구속되는 셈이다.

정보기관 수장 2명이 한꺼번에 구속되는 것은 유례가 드문 일이어서 그만큼 파장도 클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강수에는 이 사건이 국가 중추기관인 국정원에 의해 초래된 중대한 범죄행위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국가기관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전형적인 사건이어서 국민적 이해관계가 크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 검찰은 국정원이 광범위한 도청이 가능한 고성능 감청 장비를 만들어 불특정 다수의 국민을 피해자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두 전직 국정원장의 도청 가담 정도가 가장 무겁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조직 특성상 모든 권한이 원장에게 집중돼 있고 원장이 대부분의 사안을 직접 총괄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막판까지 고심=검찰은 두 전직 원장의 사법처리 수위를 놓고 막판까지 엎치락뒤치락했다.

검찰은 7일 이들의 소환조사 방침을 밝힌 뒤 △둘 다 구속 △한 사람은 구속, 한 사람은 불구속 △둘 다 불구속 등 3가지 방안을 검토했다.

두 사람 모두 불구속하자는 의견은 검찰 수뇌부에서 나왔다. 국정원이 스스로 도청 실태를 고백했고 모두 구속시 현재 국정원이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점 등을 고려하자는 취지였다.

이런 가운데 김 전 대통령이 8일 열린우리당 지도부에 “열린우리당은 나의 정치적 계승자”란 발언을 했다. 신 전 원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되기 하루 전이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9일 “이 미묘한 시점에 왜 DJ가 그런 말을 해서…”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여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의 ‘불구속 요청’이 있었다는 걸 부인하지 않았다.

검찰 수뇌부는 11일 수사팀에 두 사람 모두 불구속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타진했다. 하지만 수사팀은 강경했고 결국 주말인 13일 두 사람을 모두 구속하는 방침이 세워졌다.

▽마무리 국면=이들이 구속되면 도청 수사는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 전망이다.

남은 부분은 국정원의 도청 정보가 정치권 실세나 청와대 등으로 흘러갔다는 ‘유출 의혹’. 국민의 정부 당시 국정원장이 매주 대통령을 독대해 보고한 점과 김은성(金銀星) 전 국정원 2차장이 DJ 정부 실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도청 정보 중 일부가 유출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검찰이 이 부분에까지 수사를 확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차장이 유출 의혹을 시인할 가능성이 낮은 데다 증거 확보도 어렵기 때문이다.

홍석현(洪錫炫) 전 주미대사가 16일 소환돼 조사를 받으면 ‘안기부 X파일’ 관련 고발사건에 대한 수사도 정리될 전망이다. 이 또한 증거 확보와 공소시효 때문에 명확한 수사 결과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안기부 비밀 감청 조직 미림팀에 대한 수사는 거의 마무리돼 있는 상태다. 검찰은 미림팀장 공운영(孔運泳·구속기소) 씨의 진술을 토대로 안기부의 출장식 도청 실태를 대부분 파악했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DJ측 “이해할 수 없다”▼

임동원, 신건 두 전직 국가정보원장에 대해 14일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 측과 열린우리당, 민주당은 불만을 표시했다. 한나라당에서도 이례적으로 ‘정치적 이용’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최경환(崔敬煥) 김 전 대통령 비서관은 “두 전직 국정원장이 도청과 무관하다는 것을 확신한다”며 “정부는 먼저 부당한 사전 영장 청구를 취소하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지, 정부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관련 사항을 보고받고 상당히 불편한 심기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김만수(金晩洙) 대변인은 “청와대 반응은 없다”고만 말했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청와대 만찬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노 대통령은 일체 말이 없었지만 참모들은 곤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열린우리당 전병헌(田炳憲) 대변인은 “미림팀(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비밀 감청 조직) 수사나 두산그룹 박용성(朴容晟) 회장 불구속 수사 등과 형평에 맞지 않다”며 “도주나 증거 인멸 우려도 없는데 구속하겠다는 검찰 입장은 부당하며 대단히 유감”이라고 주장했다.

배기선(裵基善) 사무총장은 “형식적으로 약간의 잘못이 있는 걸 까발려서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겠나”라며 “이거야말로 제2의 ‘김치파동’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민주당 유종필(柳鍾珌) 대변인은 “두 전직 국정원장이 도청을 했다고 믿지 않는다”며 “오랜 도청 관행을 근절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날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김 전 대통령을 방문해 ‘덕담’을 듣고 온 한나라당의 반응은 미묘했다. 전여옥(田麗玉) 대변인은 “도청은 용납할 수 없고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면서도 “영장 청구가 진실을 밝히는 계기가 돼야지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거나 과거 역사와 정권에 대한 흠집 내기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편 국정원 관계자들은 침통한 표정이 역력했다. 한 관계자는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될 줄은 정말 몰랐다. 국정원이 통째로 매도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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