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多者회담’ 매달리는 한국 - ‘北-美회담’ 고집하는 북한

  • 입력 2005년 2월 13일 18시 13분


코멘트
‘6자회담이라는 둑을 사수하고 미국의 정책우선 순위를 북한핵 문제 해결로 돌려라.’

정부는 북한의 6자회담 참석 무기 중단 및 핵무기 보유 선언에 따른 위기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이 같은 내부 지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대응방식을 둘러싼 미국과의 미묘한 입장차 때문에 속병을 앓고 있다.

▽6자회담을 지켜라=정부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 공개 선언보다는 6자회담 참여 거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외교안보 분야의 한 핵심 당국자는 13일 “북한의 핵무기 보유 주장과 관계없이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당황하지 않는다”며 “핵무기 보유 공개 선언은 어차피 협상용이고 2003년 이후 북한이 벌이고 있는 미국과의 ‘묘한 게임’의 일환일 뿐”이라고 말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핵무기 보유를 의심받는 국가는 그 사실을 은폐하려고 애를 쓰는 법인데 북한은 오히려 핵 보유를 떠벌리면서 능력을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당국자는 “북한이 무시로 일관하는 미국의 행동에 자극받아 판을 깨자고 덤빌 경우가 난감한 것”이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정부가 6자회담이 깨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는 것은 이 회담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한 제재에 ‘방어막’으로 작동할 마지막 안전판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외교통상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미국은 당초 북-미 양자 협의를 전면 거부했으나 ‘6자회담 틀 내에서의 양자 협의’는 허용하는 신축성을 보였다”며 “이 같은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는 북한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미국의 관심을 돌려라=정부는 북한의 6자회담 참여 여부가 미국의 태도 변화에 달려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선(先)핵 폐기’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미국 정부에 대해 북한이 회담에 복귀할 수 있도록 ‘당근’을 제공하라고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월 칠레 산티아고에서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선언 수준의 합의가 있었지만 미국의 정책우선 순위는 여전히 이라크 이란 등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경희대 국제대학원 권만학(權萬學) 교수는 “현 상태는 북한의 핵 보유가 미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미국이 북한 핵을 즐기고 있는 형국”이라고 분석했다.

이봉조(李鳳朝) 통일부 차관은 “벼랑 끝 전술로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북한과 6자회담의 틀에 복귀한 뒤 이야기하라는 미국의 입장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양자 간에 접점을 찾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몫”이라고 말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열강들 이간질’ 노림수▼

북한과 미국 간에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유용성을 둘러싼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다.

한성렬(韓成烈)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는 11일 “6자회담은 끝났다”며 북-미 양자회담의 필요성을 시사했지만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 대화를 즉각 거부했다.

북한은 그동안 6자회담에 대해 계속 불만을 토로해왔으나 미국은 ‘북핵 문제는 북-미간의 일이 아니다’며 다자 해결 구도를 고수하고 있다.

▽북-미간 ‘샅바 싸움’=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핵 프로그램 시인으로 제2차 북핵 위기가 촉발된 것은 2002년 10월. 그러나 제1차 6자회담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10개월 뒤인 2003년 8월이었다.

북-미 양자회담을 주장한 북한과 다자회담을 주장한 미국의 샅바 싸움에서 미국이 승리한 데 따른 결과였다. 한국 정부의 한 핵심관계자는 “미국은 한때 호주 뉴질랜드 등까지 포함하는 ‘10자회담’을 제안할 정도로 북핵 문제의 다자적 해결 틀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는 ‘북한에 두 번 속지 않겠다’는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를 반영한 것.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빌 클린턴 민주당 정부 시절인 1994년 체결된 북-미 제네바합의는 북한에 속은 나쁜 선례라고 강하게 비판해왔다.

최근 미국이 북한의 맹방인 중국에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역할을 강하게 주문하고 있는 것도 1993, 94년 1차 북핵 위기를 북-미 대화를 통한 제네바합의로 푼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북핵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반면 북한이 10일 6자회담 무기한 불참을 선언한 것은 6자회담의 틀을 흔들어 북핵 문제 협상의 샅바를 새롭게 매거나 적어도 고쳐 잡아 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북한의 6자회담 딜레마=1차 북핵 위기 때 북한은 미국에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면서도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선 “미국이 북핵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중 전략을 구사했다. 이는 적지 않은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중국 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에서는 이런 전략이 먹혀들 여지가 매우 좁아졌다.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가 정작 6자회담 장에서는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자기모순’을 보이는 것도 이런 딜레마 때문이라고 정부 관계자는 말했다. HEU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제네바합의의 위반을 인정하는 셈이므로 6자회담 내에서의 북한의 협상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

한국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북한은 6자회담이란 새로운 틀에서도 북-미 양자 구도만 고집해 미국의 영향력만 크게 해주는 악순환을 자초해왔다”고 말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