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서정주시인]'冬天'으로 떠난 '국화의 시인'

  • 입력 2000년 12월 25일 01시 43분


24일 시인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선생의 타계와 함께 ‘한국문학의 20세기’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지난 가을 소설가 황순원이 세상을 떠난 데 이어 미당까지 사망함으로써 광복 이전부터 활동해온 대표적인 문인들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한국 시단의 최고봉이자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그를 잃은 아픔은 각별하다. ‘국화 옆에서’ 등 그의 시는 세대를 뛰어넘어 누구나 즐겨 암송했으며 많은 이들에게 시인의 꿈을 꾸게 만들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미당은 일찌감치 한국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부동의 위치를 굳혔다. ‘소설에 동리(東里·김동리), 시에 미당’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지난 60여년에 걸쳐 화려한 시작활동을 해왔다.

그가 남긴 시집은 1941년 ‘화사집’을 필두로 1997년 ‘80 소년 떠돌이의 시’까지 모두 15권. 편수로는 미발표작까지 합쳐 1000편이 넘는다. 이같은 다산(多産)은 국내에 유례가 없다. 외국에서도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비견될 뿐이다. 말년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그의 이런 열정에 대해 주변사람들은 ‘어른이 되기에 늘 부족한 소년의 마음’(未堂)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미당은 1975년 ‘질마재 신화’에서 보여줬듯 질펀한 토속어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드는 데 탁월한 면모를 지녔다. 제자인 문학평론가 윤재웅 교수(동국대 국어교육과)는 “미당 선생은 서정시인이자 오줌이고 똥이고 가릴 것 없이 주물러서 시로 만들었던 탁월한 이야기 꾼”이라고 말했다.

미당은 문학의 교주(敎主)였는데도 문학권력을 만들지 않았다. 동국대 교수 시절 미당은 이원섭 이제하 황동규 고은 김초혜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 ‘미당 사단’라는 거대 계보를 이뤘지만 그 결속은 느슨했다. 김동리가 제자를 휘어잡는 군림형이라면, 미당은 제자의 활동에 개의치 않는 방목형이었다.

하지만 필생의 시업은 그의 몇 가지 행적 때문에 빛이 바래기도 한다. 일제 말기에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했고, 1980년 신군부 등장 후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로 나선 적이 있다.

그는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해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참회하기도 했다.

35년간 미당을 스승으로 모셨던 시인 문정희씨는 “선생은 최근까지도 새벽에 일어나서 촛불을 켜고 경건하게 시를 쓰셨다”면서 “말년에도 매일 커다란 손돋보기를 들고 세계 신화에 대한 책을 치열하게 공부했다”고 소개했다.

지난 3년간 밥 대신 맥주로 요기를 하면서 세상과 절연했던 미당은 10월 평생 ‘소꿉친구’였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뜬 충격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병상에서 마지막까지 의식을 잃지 않았던 그는 별도의 유언을 하지 않고 “눈앞의 것에 휘둘리지 말고 먼 곳 보는 ‘대인’(大人)이 되라”는 말을 남겼다. 노시인이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였던 셈이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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