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홍특파원 北취재기]평양시민들 "노벨상 모양 좋아"

  • 입력 2000년 10월 26일 01시 16분


22일 오후 6시. 미국 한국 일본 기자들이 주축이 된 40여명의 보도진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시내로 이동할 무렵엔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조명이 거의 없는 도로를 10여분쯤 차로 달리자 갑자기 눈부신 불빛이 앞에 나타났다. 김일성(金日成)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이었다. 김주석의 대형초상화를 바라보며 비로소 북한 땅을 밟았다는 실감이 피부로 다가왔다.

23일 새벽. 올브라이트 장관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돌연 공항의 전기가 나갔다. 몇 분 뒤 전기는 들어왔지만 국가기간시설인 공항에서 ‘국빈’영접을 준비하는 도중 정전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어려운 전력 사정을 실감할 수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다시 평양시내로 돌아올 때는 출근시간이었다. 통행이 뜸한 차도에 군인들이 탄 트럭 행렬이 보였다. 앳된 표정의 군인들은 취재차량이 신기했는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뜻밖에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환하게 웃는 그들의 순박한 얼굴에선 ‘철천지 원수 미제’에 대한 적개심을 찾기 어려웠다.

기자는 98년 11월 금강산 관광이 처음 시작됐을 때 군사시설인 해금강 지역을 찾은 남측의 첫 관광객들을 잔뜩 노려보던 북한 군인들의 날카로운 눈매가 떠올랐다. 이젠 북한의 군도 달라지고 있는 것일까.

이날 저녁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올브라이트 장관이 참관한 가운데 5·1경기장에서 열린 노동당 창당 55주년 기념 집단체조 시범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취재진이 안내된 곳은 김 위원장 등의 자리가 있는 귀빈석. 정적과 긴장이 감돌던 경기장은 김 위원장의 입장을 알리는 환영음악이 연주되자 열광의 도가니로 돌변했다. 공연진과 관객들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발을 구르며 만세를 연호했다. 기자를 안내하던 북측 안내원도 뜨거운 박수를 치며 만세를 외쳤다.

이어 진행된 1시간10분간의 집단체조는 필설로 형언키 어려운 웅장한 스케일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함의 극치였다. 수만명의 학생과 군인이 혼연일체가 돼 마치 정교한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사람의 숨결’은 느껴졌다. 아파트의 창가에는 곱게 키운 화분들이 놓여 있었고 거리엔 이따금씩 생맥주집이나 술집도 눈에 띄었다. 기자가 접한 제한된 범위의 북한 사람들은 무척 순박하고 친절했다.

외국인 통역을 맡은 한 여성 안내원(25)은 “북에도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다”며 “통일이 돼 남쪽 총각하고 결혼하면 좋을 텐데 잘될지 모르겠다”며 수줍게 웃었다.

최근 남북교류에 힘입어 평양에는 남측 사람들과 물건이 이미 낯설지 않은 존재로 자리잡았다. 고려호텔 2층 카페에는 한국산 TV가 비치돼 있었고 취재진을 안내한 한 안내원도 한국산 캠코더를 들고 다녔다. 이 호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삼성 직원들이 취재진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 안내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 “북측에선 노벨상을 잘 모르긴 하지만 수상 소식은 전해들었다”며 “북남간에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받았다니 모양도 좋고 잘된 것 같다”고 말했다.

취재를 마치고 평양을 떠나기 전 한 미국기자는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해서 여름이 온 것은 아니다”라고 북―미 관계의 급속한 진전에 신중론을 폈다. 기자는 그에게 한국에는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응수했다.

<한기홍특파원>eligio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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