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수 북송]남편과 생이별 이혜자씨 '애절한 사연'

  • 입력 2000년 8월 31일 18시 32분


“이념이 도대체 뭔가요. 고향과 처자식까지 남겨두고 홀로 떠나는 당신은 누굽니까.”

2일 북한으로 떠나는 비전향장기수인 남편 석용화(石容華·75·부산 동래구 안락동)씨와 생이별을 해야 하는 부인 이혜자씨(63). 27년간을 한 이불 속에서 살아온 남편을 보내야 하는 이씨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씨는 31일 “남들은 헤어진 가족을 못 만나서 몸부림치는데 우리는 이별을 위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며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 삶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씨는 “한평생 신념을 지켜온 반려자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면서도 선뜻 남편의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울산 울주군 언양면이 고향인 이씨가 석씨를 처음 만난 것은 73년. 경남 양산시 하북면 출신인 석씨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52년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장면(張勉)정부가 들어서면서 20년형으로 감형받아 72년 출소한 후 1년 만이었다.

▼"죽을때까지 사랑" 약속▼

이웃집 아주머니가 “사람 하나는 믿을 만하다”며 석씨를 소개해 만났다. “당시에는 먹고 살기가 바빠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몰랐다”는 이씨는 결혼을 앞두고 집안의 반대가 심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에 석씨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석씨는 당시 “죽을 때까지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말했다.

결혼 후 남편은 조용한 성격인데다 그렇게 자상할 수가 없었다는 것.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광복 후 친일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는 “앞으로 일절 그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생계수단이 막막해 포장마차와 식당 등을 운영하면서 10여 차례 이사를 할 때마다 정보기관의 감시와 ‘빨갱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녀 가슴을 짓눌렀다. 남편을 부둥켜안고 “그래도 살아보자”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가족사진이 마지막 선물▼

숨죽여 살아온 이씨는 현재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26, 22세의 두 딸만큼은 이런 아픔을 겪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왔다.

같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가 원망스러운 이씨에게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며 두 손을 꼭 잡아주는 남편의 체온이 그나마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씨는 “남편의 모든 것을 정리했다”며 “딸들이 원해서 마지막으로 가족사진 한 장 찍어 남편에게 준 것이 선물의 전부”라며 울먹였다.

이씨는 혈육의 정(情)도, 기약 없는 이별의 아픔도 결코 남편의 이념을 녹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부산〓조용휘기자>sile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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