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硏 파행운영]"정부 불리한 것 발표말라"연구결과 쉬쉬

  • 입력 2000년 7월 2일 19시 20분


정부가 운영하는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이 정부에 불리하거나 정부 입장과 배치되는 연구결과를 내놓자 관련 부처와 연구원이 이를 은폐하고 담당자를 문책하는 사례가 잇달아 말썽을 빚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의 연구결과 은폐는 순수한 학문적 성과를 정치적 목적으로 판단하고 숨긴다는 점에서 정부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국민의 알 권리를 봉쇄하는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국무총리실 산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원장 정경배·鄭敬培)은 최근 연금제도의 허점과 위기상황을 지적하는 논문을 실은 자체 월간지 ‘보건복지포럼’ 6월호의 인쇄를 발행 직전에 전면 금지시켰다. ‘보건복지포럼’ 6월호는 보사연 소속 연구원들의 ‘연금특집’ 등 논문 9편을 모은 100여쪽 분량으로 편집회의까지 끝내고 5월말경 인쇄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중 문제가 된 논문은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 등 공적 연금에 대한 것으로 현행 국민연금이 보험료는 낮게, 지급액은 지나치게 높게 설계돼 2009년경 적게는 28조3000억원, 많게는 115조원 가량 보험료 수입의 부족이 예상된다는 내용이다.

인쇄 직전에 이 내용을 발견한 정원장은 “논문 내용에 문제가 있다”며 갑자기 인쇄 중단을 지시했다. 보사연은 이에 대해 “6월호에 실을 원고가 준비되지 않아 7월호와 합본해 발행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

정원장은 또 의료계가 집단폐업을 시작한 지난달 20일 연구원의 연구조정실장 조재국씨가 한 경제지에 기고한 ‘의약분업 해결방안’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경직된 의료보험제도가 집단폐업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지적하자 당일 직위해제했다.

조씨는 칼럼에서 의사들이 집단폐업을 자제하고 의약분업 실시에 동참해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지만 보건복지부와 정원장은 집단폐업의 원인이 정부의 잘못된 의료정책과 의료제도 때문인 것처럼 비쳐지게 된 데 대해 불쾌하게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조세연구원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한달 앞둔 3월 중순 적정 재정적자 규모와 재정건전화 방안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재정적자 규모가 지금과 같은 속도로 늘어날 경우 국가 재정이 정상적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14.6년에 불과하다”고 경고했다가 상부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

보고서는 재정적자 축소의 당위성을 언급한 정상적인 연구결과였지만 국가부채가 선거쟁점으로 부각된 상황에서 국책연구기관이 야당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듯한 내용이 담기자 재정경제부 담당국장이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해명하고 연구원 수뇌부를 크게 질책했다.

국방부 역시 국방정책의 문제점을 진단한 ‘국방환경과 주요 현안’이라는 제목의 비공개 보고서가 4월 보도되자 보고서를 작성한 한국국방연구원에 유출경위를 조사하면서 연구원들을 심하게 꾸중해 당사자들이 강력히 반발했다.

이 보고서는 한미동맹관계 병무비리 대북정책 전력증강 등 주요 현안별 문제점을 중장기 정책대안과 함께 제시하고 있는데 조성태(趙成台)국방장관은 언론보도 직후 관련 연구원들에게 모두 사표를 받으라고 지시했다가 참모들의 권유로 이를 철회했다.

익명을 요구한 보사연의 한 관계자는 “김영삼 정부 시절 국책연구기관들이 눈덩이 같은 외채의 심각성을 수차례나 지적했음에도 정부가 이를 묵살하다 외환위기를 불렀다는 점으로 볼 때 올바른 연구결과의 묵살이 가져올 위기는 심각하다”고 말했다.

<송상근·박희제·박원재기자>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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