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선언이후]'통일의 싹' 4강 균형외교가 '거름'

  • 입력 2000년 6월 19일 19시 40분


“이제부터는 ‘진짜 어려운 외교’가 될 것 같다. ‘냉전 외교’때는 미국 등 우방을 편들고 북한에 반대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외교 현안마다 주변 4강국과의 관계는 물론 남북한의 이익까지 정교하게 계산에 넣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6·15 남북 공동선언’을 지켜보며 한 정부 당국자가 한 이 말 속에는 ‘통일시대’를 열어가야 할 한국 외교의 희망과 고민이 축약돼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우리 외교에 던져 준 새 화두(話頭)는 ‘전방위 대응’이며 상황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복안(複眼)적, 다면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남북관계가 본격적으로 4강의 역학 관계 속에 던져짐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국내적 요인보다 국제적 요인에 의해서 더 영향을 받을 수 있게 됐음을 뜻한다.

남북 정상들은 물론 “평양 정상회담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현상 유지’를 깨자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기존 질서에 변화가 불가피하다. 설사 그것이 현상 유지에 기초하는 변화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질서의 형성기에는 관련 국가들끼리의 세력 다툼이 뒤따르게 돼 있다. 더욱이 한반도처럼 4강의 한가운데 놓여 있으며,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부닥치는 전략적 요충 국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15일 귀환 보고에서 말했던 것처럼 ‘4대국이 우리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한복판에서 이용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 나가려면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신중한 외교’를 먼저 들었다. 기존 한미일 3각 공조를 튼튼하게 유지하되 중국 러시아와도 소원해지지 않도록 하는 조심스러운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4강이 남북관계 개선을 지지하고 도와줄 수 있도록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외교도 펴야 한다.

외교안보연구원 박두복(朴斗福)교수는 “남북한 관계 정상화와 경쟁적 입장에 서는 4강 외교간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가는 정책의 수립이 우리 외교의 중대 현안”이라고 말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4강은 한결같이 환영한다고 말했지만 실제의 속셈은 모두 다르다.

미국의 경우는 ‘남북문제의 자주적 해결’이 주한 미군 철수 등을 통한 영향력 손실로 이어질까 우려한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로서는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카드가 되고 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으로 중국의 대한반도 영향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을 각종 세계경제기구에 가입시키는 등 ‘경제 개방’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은 미국이 갖고 있다. 이처럼 4강의 이해 관계는 얽히고 설켜 있다.

서울대 윤영관(尹永寬·국제정치학)교수는 “4강이 앞으로 남북한에 미칠 영향과 역할을 사안별로 구분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는 군사 안보적 틀을 유지하면서 미-일의 대북 경제 지원을 유도할 경제적 해법도 함께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냉전 사고에 오랫동안 젖어 온 우리 외교 마인드와 인력으로 과연 이런 과제들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드러났지만 여전히 우리 외교는 대통령과 일부 ‘비선라인’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직업 외교관들은 국가의 중대사 결정 과정에서 자주 소외된다.

이정빈(李廷彬)외교통상부장관은 기회있을 때마다 작금의 상황을 “우리 외교 100년 만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고 말해 왔다. 그런 기회를 살려 나가기 위한 외교 인력의 총체적인 점검도 당장 서둘러야 할 일 중의 하나다.

<부형권기자>bookum90@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