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기자] 거물들의 정치적 망명은 접수국과 대상국의 관계와 뒤얽혀 복잡하게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사관을 통한 망명일 경우 주재국과의 문제까지 겹쳐 망명이 실현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곤 한다.
중국주재 미국대사관으로 망명했던 중국의 저명한 반체제 물리학자 方勵之(방려지)부부는 3백85일만에 제삼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89년 6.4천안문사태당시 방려지부부의 미대사관 망명은 중국주재 망명대상국 대사관으로의 망명. 방부부는 북경 유혈진압사태가 있은 다음날인 5일 미대사관직원들의 무장호위속에 미대사관으로 긴급피신, 미국 중국간에 뜨거운 쟁점이 됐다.
중국측은 방이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한 범법자이므로 신병을 인도하라고 미국측에 요구했다. 미국측은 인권보호를 이유로 이러한 요구를 거절했지만 방을 국외로 도피시킬 수도 없는 처지였다.
대국의 체면이 걸린 미―중간의 신경전속에서 불안한 생활을 하던 이들 부부는 다음해 6월26일 중국당국의 출국허가로 영국으로 향한다. 「제삼국으로 갈것, 정치활동을 하지말것」 등의 조건을 단 이들의 망명허가는 미대사관체류 3백85일만이었다.
호네커 서기장부부는 권력에서 축출된후 첫번째 망명지인 구소련(러시아)에서조차 정착하지 못해 옛소련주재 칠레대사관에서 7개월간 「망명생활속의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호네커 부부가 베를린장벽 탈주자에 대한 발포명령을 내린 혐의로 독일법정에 서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구소련으로 피신한 것은 91년3월. 이곳에서 불안한 망명생활을 하던 이들은 러시아공화국이 출국명령을 내리자 같은해 12일 칠레대사관에 피신해야만 했다.
그러나 칠레정부는 독일정부와의 관계를 고려, 그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지 않은 채 칠레대사관의 「손님」으로 취급했다. 결국 그는 「국제미아」로 칠레대사관에서 피신생활을 하다 92년7월 독일당국에 소환됐다.
공산헝가리정권하의 민주투사 민젠티 대주교는 56년 헝가리반공의거당시 미국대사관으로 피신, 15년동안을 그곳에서 보냈다. 당시 민중봉기는 유혈진압으로 끝났고 진압이 끝날즈음 대주교는 헝가리주재 미대사관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헝가리정부는 교황청을 통해 끈질기게 민젠티대주교의 출국을 요구했으며 대주교는 마침내 교황청의 권유를 받아들여 오스트리아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