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독립 250주년 기념일이었던 4일 오전(현지 시간), 뉴욕 거리에서 생각만큼 많은 성조기가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미국은 그날의 이벤트에 맞춰 옷을 입는 문화가 강하다. 얼마 전 뉴욕을 연고지로 둔 미국프로농구(NBA) 팀 닉스가 결승전에 진출했을 땐 한 달 내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닉스 유니폼과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이들로 거리가 붐볐다. 그런데 ‘쿼터 밀레니엄’으로 불리는 국가의 역사적 기념일에 성조기가 그려진 옷 대신 평범한 옷차림을 한 이들이 많으니 영 어색했다.
‘갈라치기 정치’가 낳은 성조기 수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보면 ‘이 나라 사람들만큼 자기 나라 국기를 사랑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티셔츠부터 연필, 컵케이크에 이르기까지 일상 속 많은 물건과 디자인에 성조기가 녹아 있어서다. 특히나 언젠가부터 태극기라는 단어가 정치화돼 비난과 조롱의 의미까지 담게 된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모두가 순수하게 자국의 상징을 좋아할 수 있는 미국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독립기념일의 성조기는 과거와 많이 다른 상황에 놓였다. 지난해 재집권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24년 미 대선 과정에서부터 성조기를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상징으로 앞세우면서다. 최근 한 미국 언론은 “성조기는 어떤 이들에게는 미국의 국기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막대기에 꽂힌 마가 모자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자신이 트럼프 지지자로 여겨질 것을 우려한 이들이 성조기를 피하면서, 일각에서는 독립기념일에도 성조기가 그려진 옷을 입지 않거나 집 앞마당에 성조기를 걸지 않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반대로 보수색이 강한 지역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앞마당에 성조기 장식을 건다. 이런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조기를 걸지 않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일부는 정치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성조기를 걸기도 한다고 말한다. 모두의 자유와 평등을 건국 이념으로 삼은,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미국에서조차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은 거의 절반(47%)이 ‘다가오는 독립 250주년에 흥미를 거의 또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답했고, 과반(52%)이 ‘독립기념일에 집에 성조기를 게양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美건국 정신은 ‘하나 되는’ 정치
미국의 정신을 담은 독립선언서의 가장 중요한 문장은 두 가지다. 우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됐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지배받는 자(국민)들의 동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로 구성된 이민 국가인 미국에서 출신국이나 인종의 다름과 상관없이 온 국민이 이런 정신 아래 하나가 되는 건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도 무척 중요했다. 지금의 미국을 만든 250년의 힘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이들이 모여 이룬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공동체 의식과 개척 정신에서 비롯됐다. 또 이는 세계적인 기업과 기술을 만든 ‘기업가 정신’으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요즘 미국의 상황을 보면 설령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도, 혹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진짜 미국인’이더라도 과연 성조기 아래에서 모두가 같은 온전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까 싶다. 이민자, 성소수자, 비(非)백인,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미국을 세운 독립선언서의 핵심 철학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4일 밤 진행된 250주년 기념 연설에서도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며 갈라치기 정치 메시지를 냈다. 누군가를 악마화해 반대편의 분노를 자극하고, 누군가를 배제해 그 반대의 결속력을 극대화하는 건 가장 쉽지만 가장 나쁜 정치다. 과연 미국은 건국 300주년에 성조기 아래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미국인들뿐 아니라 우리도 분노에 당하지 않고 똑똑한 공감을 이뤄낼 수 있길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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