췌장암을 비롯한 암세포 연구를 형상화한 이미지. 미국 연구진은 암세포의 성장 신호를 과도하게 활성화해 세포가 스스로 죽도록 유도하는 후보물질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게티이미지뱅크
췌장암 세포의 성장 신호를 억제하는 대신 오히려 과도하게 활성화했더니 암세포가 스스로 죽는 현상이 관찰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연구진은 이번 발견이 치료가 어려운 췌장암의 새로운 치료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 A&M대 약학·공중보건연구소 연구진은 실험용 화합물인 ‘PCAI(polyisoprenylated cysteinyl amide inhibitors)’가 췌장암 세포를 사멸시키고 암세포의 이동 능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효과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온코타깃(Oncotarget)에 게재됐으며, 29일(현지시간) 과학 전문 매체 사이언스데일리가 소개했다.
췌장암은 가장 치명적인 암 중 하나다. 특히 췌장관선암 환자의 약 90%에서는 KRAS 유전자 변이가 발견되는데, 이 변이는 암세포의 성장과 증식을 촉진해 치료를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일부 KRAS 변이를 표적으로 하는 치료제가 개발됐지만 적용 대상이 제한적이어서 새로운 치료법 개발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연구진은 KRAS 변이를 가진 췌장암 세포를 대상으로 PCAI의 효과를 분석했다. 그 결과 ‘NSL-YHJ-2-27’이라는 화합물이 특히 강력한 항암 효과를 보였다.
● ‘암 성장 스위치’ 끄지 않고 과열시켰더니
이 물질은 낮은 농도에서도 암세포의 이동을 90% 이상 억제했다. 암세포가 주변 조직이나 다른 장기로 퍼지는 데 필요한 이동성과 침윤 능력을 크게 떨어뜨렸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이 화합물이 암 전이를 억제하는 데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은 부분은 항암 작용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항암제는 암세포의 성장 신호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PCAI는 암 성장과 관련된 주요 신호전달 체계인 MAPK와 PI3K/AKT 경로를 억제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 경로를 과도하게 활성화시켰다.
연구진은 지나친 신호 활성화가 세포 내 균형을 무너뜨려 결국 암세포의 자멸(apoptosis)을 유도한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 PCAI를 처리한 암세포에서는 활성산소종(ROS)이 증가했고, 세포 사멸을 유도하는 카스파아제 효소와 BAX 단백질 활성도 높아졌다. 세포자멸사 역시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또 유전자 발현 분석에서는 종양 억제 기능을 가진 유전자들의 활성은 증가한 반면, 암 진행과 전이에 관여하는 유전자 활성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종양 환경과 유사하게 만든 3차원 종양 모델에서도 암세포 덩어리가 붕괴되고 주변 조직으로 침윤하는 능력이 감소했다.
● 기존 표적치료제와 다른 ‘범-KRAS’ 전략 가능성
연구진은 PCAI가 특정 KRAS 변이 하나만 표적으로 하는 기존 치료제와 달리 다양한 KRAS 변이를 가진 암세포에도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실험에서는 췌장암에서 흔히 발견되는 KRAS G12C 변이 세포주(MIA PaCa-2)와 KRAS G12D 변이 세포주(PANC-1) 모두에서 항암 효과가 확인됐다.
연구를 이끈 나자리어스 라망고 교수는 “PCAI는 기존 KRAS G12C 표적 치료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설계된 후보물질”이라며 “다양한 KRAS 변이를 가진 암 치료의 새로운 전략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연구는 사람 대상 임상시험이 아닌 세포실험 단계에서 수행된 연구다. 실제 환자에게서 동일한 효과와 안전성이 확인되기까지는 추가적인 동물실험과 임상시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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