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1] 가까운 미래. 루나공업주식회사가 전 세계 에너지를 공급해요. 이 글로벌 회사는 달에서 캐낸 암석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신기술을 보유했지요. 달 채굴기지 근무자는 오직 한 명 ‘샘’. 2주 후면 3년의 계약 기간을 마치고 가족이 기다리는 지구로 귀환할 생각에 가슴이 벅차요. 자, 광물 수거를 위해 기지를 나선 샘. 그만 차량이 분화구에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의식을 잃어요.
눈을 떠보니, 기지에 돌아와 있네요. 미심쩍은 마음에 사고 장소를 다시 찾은 샘은 깜짝 놀라요. 반파된 차량 속에 기절해 있는 게 자기 자신 아니겠어요? 알고 보니 샘은 복제인간이었어요! 가족에 대한 기억은 회사가 이식한 것이고, 계약 기간 3년은 복제인간의 수명, 즉 가동 기간이었죠. 부상당한 샘(A)을 구해낸 샘(B). 수명이 열흘 남짓 남은 샘(A)은 연일 피를 토하며 죽어 가고, 두 샘은 기지 컴퓨터에 숨겨진 파일에서 충격적 영상을 발견해요. 이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샘들이 건강 이상을 호소하며 소멸해 가는 모습이 유언처럼 담겨 있었죠. 두 샘은 지구에 있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요. 거기엔 진짜 인간 ‘샘’이 딸과 잘 살고 있네요. 샘(A)은 울부짖어요.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싶어! 그런데 지구엔 진짜 샘이 있네? 그럼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샘(A)은 이내 마음먹어요. 그래도 지구로 가겠다고. 샘(A)은 샘(B)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 지구로 향하는 광물 수송선에 몰래 태워요. 저 샘(B)은 곧 나이니, 내가 지금 죽어도 나는 계속 살아 그리던 가족을 만날 테니까요. 샘(B)이 탄 우주선이 달을 박차고 오르는 모습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샘(A)은 숨을 거둬요.
자, 어때요? 영국 덩컨 존스 감독(전설적 팝스타 데이비드 보위의 아들이다)의 장편 데뷔작 ‘더 문’(2009년)의 플롯이에요. 알려지지 않은 영화지만, ‘나는 누구인가’란 정체성 문제부터 거대 기업의 지배와 노동 착취, 소모품으로 전락한 인간, 그리고 죽음을 통해 마침내 존속한다는 생명의 영원성까지…. 복제인간을 소재로 도달 가능한 가장 흥미롭고 깊은 지점까지 나아간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2]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은 아주아주 중요해요. 프랑스 칸 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에서 동시에 최고상을 받은 역사상 세 번째 작품인 ‘기생충’ 이후 봉준호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고, 미국 워너브러더스가 2000억 원에 육박하는 순제작비를 들여 탄생시킨 봉준호의 첫 100% 미국 영화이며, 철학의 근본 질문인 정체성을 다루는 봉준호의 첫 번째 작품이니까요.
미키 17에 아쉬운 점은, 저조한 흥행 성적이 아니에요. 봉준호의 전작처럼 새롭거나 용감하거나 도발적이지 않다는 데 있어요. 첫 장편 ‘플란다스의 개’부터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불온한 무언가를 감히 발설하고, 하면 안 되는 일을 저질러 버리는 듯한 봉준호의 지독히 싸가지 없는 태도가 저는 너무너무 좋았어요.
하지만 복제인간 미키 17이 자신에 이어 프린트된 미키 18과 조우하면서 혼란에 빠지는 내용을 담은 이번 영화는 인간 소외, 노동 소외, 계급 갈등, 식민주의, 생태주의, 인종 차별과 우생학 등 봉준호가 전작들을 통해 제기한 문제의식들이 집대성되었지만, 시종일관 뭔가 원만하고 고분고분하고 친절하고 설명적인 자세가 이 작품을 힘이 달리고 고루하게 느끼도록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요. 미키 17은 더 단호하고 이상하고 쌀쌀맞거나, 아니면 반대로 더 뜨겁고 바보 같고 뭉클해야 했어요.
미키 17엔 모순이 있어요. 인간 사회는 분열과 갈등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립, 충돌, 반목의 관계로 바라보면서도 정작 이런 인간들에겐 난생처음 마주하는 외계 생명체를 적대시하지 말고 사랑으로 포용하라고 설득하니까요. ‘설국열차’ ‘기생충’의 지배-피지배 세계관과 생명 존중이라는 ‘옥자’의 가치관이 충돌해 버리는 지점이죠.
짐작건대, 봉준호라는 신선한 상상력을 수혈함으로써 익숙하면서도 낯선 글로컬(glocal)한 영화를 내놓으려 했던 할리우드의 계획이, 막대한 돈이 투자된 영화를 글로벌하게 흥행시켜야 하는 봉준호의 현실적 고민과 접점을 찾지 못해 발생한 거대 자본의 역설은 아닐까, 생각도 해봐요.
[3] 저는 대한민국의 자랑 봉준호가 이 작품을 변곡점 삼아 ‘어나더 레벨’로 전진하기를 바라요. 세상을 나눠 보는 뺄셈과 나눗셈의 예술에서, 경계를 허물고 아우르는 덧셈과 곱셈의 예술로요. ‘더 문’에서 복제인간 샘은 결국 ‘사랑’의 진짜 의미를 깨달으면서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어요. 그는 알게 되죠. 사랑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귀히 여기는 마음가짐이란 사실을요. 상대를 손가락질하는 것보다 어려운 건 끌어안는 일이에요. 앨프리드 히치콕도, 스탠리 큐브릭도, 마틴 스코세이지도 그건 이뤄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앞으로의 봉준호에게 기대합니다. 궁극의 예술은 사랑이니까. 사랑이 제일 어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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