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삶의 무게[이은화의 미술시간]〈356〉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5일 23시 09분


젊은 멕시코 여성이 꽃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등에 메고 있다. 머리는 양 갈래로 단정히 묶었고, 두 손으로 어깨에 멘 바구니 끈을 단단히 잡았다. 단호한 자세와 표정이지만 입술이 갈라져 힘겨워 보이기도 한다.

이 인상적인 그림은 알프레도 라모스 마르티네스가 그린 ‘칼라릴리 상인’(1929년·사진)이다. 멕시코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르티네스는 멕시코 민중의 삶과 문화를 담은 그림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꽃 파는 여성을 묘사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일이 흔했다. 특히 백합을 닮은 하얀 칼라릴리는 문화적, 상징적 의미가 커 수요가 많았다. 아름다움, 순수, 부활의 상징으로 종교 행사, 결혼식, 장례식 등 다양한 의식에 사용됐을 뿐 아니라 원주민 공동체에서는 신성한 꽃으로 여겨졌다. 수요가 크다 보니 여성 농민들에게는 가계 경제를 돕는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그림 속 여자의 어깨에 그녀 가족의 생계가 달렸을지도 모른다.

1910년 마르티네스가 파리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자 멕시코 혁명이 발발했다. 35년의 디아스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린 후 억압받던 노동자, 농민, 원주민 등 민중 중심의 정치 이념이 등장하면서 멕시코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있었다. 마르티네스는 예술이 사람들에게 자부심과 정체성을 심어주고,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이 그림 역시 단순히 꽃 파는 여성의 초상이 아니라 멕시코 민중의 삶과 문화적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 속 여성은 고요하면서도 단단하고 강인해 보인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큰 꽃바구니는 고된 노동의 현실을 대변할 터. 아무리 꽃이 예쁘다 해도 시장은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다. 그녀가 어깨에 짊어진 건 그저 예쁜 관상용 꽃이 아니다. 지켜야 할 노동의 존엄이자 치열한 삶의 무게다.

#알프레도 라모스 마르티네스#칼라릴리 상인#멕시코 현대미술#민중의 삶#여성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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