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주의 펀드의 표적 된 韓기업 4년 새 10배로[횡설수설/정임수]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26일 2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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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주의 펀드의 장단점이 있는데도 한국에서 유독 ‘기업 사냥꾼’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굳어진 건 외국계 펀드의 ‘먹튀’가 잇따르면서다.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 삼아 기업을 압박한 뒤 주가가 오르면 막대한 시세 차익을 챙겨 떠난 사례가 반복된 것이다. 소버린이 SK그룹을 공격해 1조 원 가까운 차익을 올렸고, 칼 아이칸은 KT&G를 상대로 1500억 원을 벌었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제동을 걸더니 한국 정부를 상대로 1조 원짜리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다.

▷요즘 개미투자자들에게는 단 1%의 지분으로 K팝 지형을 뒤흔든 토종 행동주의 펀드가 유명하다. 이창환 대표가 이끄는 얼라인파트너스는 SM엔터테인먼트와 라이크기획 간의 계약을 문제 삼아 경영권 분쟁을 촉발시키더니 ‘이수만 없는 SM’의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이보다 앞서 한진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벌인 KCGI, 일명 강성부펀드는 한진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등에 업고 이름을 날렸다. 한때 개미들 사이에선 ‘강따’(강성부 따라잡기) 투자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행동주의 펀드들의 표적이 되는 한국 기업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한국 기업은 77곳으로, 4년 만에 10배 가까이 급증했다. 조사 대상 23개국 가운데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규모다. 한국 기업들이 팬데믹을 거치며 역대급 실적을 올렸는데도 주가는 저평가된 곳이 많다 보니 국내외 펀드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올 들어 정부가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겠다며 ‘기업 밸류업’ 대책을 내놓자 이에 편승한 행동주의 펀드의 공습이 더 거세지고 있다. 3월 주주총회에서 배당·자사주 매입 확대, 경영진 교체, 감사위원 선출 등을 요구한 펀드가 한둘이 아니다. 전략도 더 치밀해졌다. 늑대가 무리 지어 먹잇감을 사냥하듯 소수 지분을 가진 펀드들이 뭉쳐 한 기업을 공격하는 ‘울프 팩’ 전술이다. 삼성물산 주총에선 영국계 시티오브런던 등 5개 펀드가 연합해 회사가 계획한 것보다 8000억 원이나 많은 주주 환원을 요구하다가 표 대결에서 졌다.

▷해외에서는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의 사회·환경적 책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긍정적 평가도 받지만, 단기 주가 부양에만 매달려 경영권을 위협하고 기업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펀드가 적지 않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같은 투기적 펀드에 맞설 경영권 방어 장치는 여전히 국내에 도입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통 크게 주주 환원을 확대하라고 하는 건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가라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행동주의#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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