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나무들에게[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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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일흔이 넘은 프랭키는 허름한 체육관을 운영하며 권투 선수를 키우는 트레이너다. 어느 날, 서른이 넘은 여자가 권투 선수로 성공하겠다며 그를 찾아온다. 남자도 아닌 데다 나이까지 많아 단칼에 거절하지만 그녀, 매기는 프랭키의 실력을 알기에 끈질기다. 그는 결국 매기를 받아들인다. 매기는 식당 일을 병행하며 밤낮으로 연습에 매진해 불과 1년 반 만에 챔피언과 타이틀 매치를 가진다. 대전료가 무려 밀리언 달러(100만 달러)다.

프랭키와 매기는 닮았다. 둘 다 외톨이다. 프랭키의 유일한 가족인 딸은 오래전 연을 끊었고, 매기 또한 힘들게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지만 놀고먹는 부모와 형제로부터 존중도, 감사도 받지 못한다. 프랭키가 매기에게 주지시키는 최우선은, 항상 자기 몸부터 보호하라는 건데 매기는 매번 이 약속을 잊는다. 하루빨리 챔피언이 되는 것이 자기를 믿어준 프랭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여겨 만신창이가 될지언정 반드시 이긴다.

드디어 챔피언과 맞붙는 날, 매기가 예상외로 강한 모습을 보이자 챔피언은 고의적으로 반칙을 범한다. 매기는 목뼈를 크게 다친다. 전신마비가 된 매기. 그녀의 가족은 평생 누워 지낼 매기를 눈앞에 두고도 매기의 재산에만 관심을 둔다. 매기가 힘들게 돈을 벌어다줘도 항상 불만이었던 그들. 그럴수록 매기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다고 여겨 더 많은 것을 퍼주려고 애써왔다. 가족에게 인정받고자 자신을 혹사시켰다.

천덕꾸러기로 서럽게 자란 자식일수록 효도한다. 받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뒤늦게라도 받고 싶어서다. 다른 형제보다 더 잘하면 부모가 자기를 사랑해줄 거라 믿고 끊임없이 희생한다. 하지만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의 순위는 바뀌기 어렵다. 차별하는 이유가 자식이 아니라 부모에게 있으니까.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처럼, 번듯하게 잘 키운 나무는 비싼 값에 팔려 부모를 떠나고, 보살핌을 못 받아 굽은 나무는 부모 곁에 남아 끝까지 효도한다.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가 제일 큰 법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폭력이, 형제에게 당한 무시가 가장 아프지만 그 상황을 벗어날 생각을 못 한다. 더 노력하면 가족들이 자기를 대접해줄 거라는 환상을 갖고 계속 애쓴다. 매기가 그러했다. 하지만 프랭키를 만나서 변한다.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해 준 프랭키 덕분에 매기는 당당해지고, 자신을 함부로 여기던 가족에게서 벗어난다. 짧지만 행복한 인생이었기에 후회 없다며 생의 마지막도 스스로 정한다. 자신의 진가를 모르고 살던 매기와 프랭키, 그 둘이 만나 서로의 가치를 100만 달러, 아니 그 이상으로 만들어줬다. 서로에게 진정 챔피언이다.

이정향 영화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밀리언 달러 베이비#굽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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