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0〉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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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구멍 속 삶은 콩들이
쭈뼛쭈뼛 자리를 바꾸는 까닭은

너 먼저 들어가라
등을 떠미는 게 아니다

온 힘으로 몸을 굴려
눈 뜨고도 볼 수 없는 싹눈을
그 짓무른 눈망울을

서로 가려주려는 것이다

눈꺼풀이 없으니까
삶은 눈이 전부니까





―이정록(1964∼)




1930년대에 시인 백석은 잡지에서 “입을 다물고 생각하고 노하고 슬퍼하라”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분노를 권한다니 조금 이상스러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들은 조선의 상황에 대해 분노해야 옳았다. 다시 말해 절대 다수가 단 하나의 위대한 분노를 품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하나의 분노는 없다. 위대한 분노는 갈래갈래 쪼개졌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작은 분노의 주인이 되었다. 이제 분노는 때만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간다면 쌓아놓은 분노를 기꺼이 터뜨릴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분노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두렵다.

두려움이 마음을 싸늘하게 만들 때 이 시를 읽었다. 여기에는 불린 콩들이 맷돌구멍에서 뱅글뱅글 도는 장면이 나온다. 분노의 마음이라면 하찮은 콩마저 서로를 밀어대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은 저 콩들이 서로서로 도와주는구나 생각했다. 콩은 온 힘을 다해 상대방의 짓무른 눈을 가려주고 있다. 여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콩은 나도 너도 연약하고 위태롭지만 서로를 생각한다. 내가 위태롭다고 화를 내고 상대방이 연약하다고 분노를 퍼붓지 않는다.

가을에는 낙엽도 곡식도 모두 따뜻한 색을 입는다. 사람들도 따뜻한 옷을 꺼내 입지만 마음은 춥다. 분노에 파랗게 질린 마음들에도 가을볕이 들었으면 좋겠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눈#이정록#맷돌구멍#가을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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