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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사는 길[삶의 재발견/김범석]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입력 2021-11-26 03:00업데이트 2021-11-2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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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침샘암으로 세상을 떠난 소설가 최인호 씨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환자로 죽고 싶지 않고 작가로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현대의학은 인간의 수명을 늘렸다. 현대의학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여서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어떻게 해서든 살아있게 해준다. 인공호흡기, 승압제, 심폐소생술, ECMO(체외막산소요법)를 하면 숨은 쉬고 심장은 뛴다. 말할 수 없고 의식은 없어도 멎었던 심장을 강제로 뛰게 하고 죽은 폐에 강제로 공기를 불어넣어 숨쉬게 해준다. 그렇게 현대의학은 인간의 수명을 늘렸고 임종도 늦췄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지켜냈다.

하지만 현대의학이 지키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우리 삶의 가치이다. 현대의학의 가치와 환자의 가치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외면해 왔고, 앞으로도 외면할 것 같다. 생존 기간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검사 수치가 얼마나 좋아졌는지에 대한 의학적 근거(evidence)는 계속 쌓여가고 있으나, 이로 인해 환자가 아닌 사람이 얼마나 어떻게 좋아졌는지에 대한 근거가 쌓이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오죽하면 근거중심의학에서 가치중심의료로 선회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삶의 가치는 곧 그 사람이고 정체성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을 병원이 규정짓고 있고 환자와 비환자도 병원이 규정짓는 가운데 삶의 가치가 서 있을 곳은 점차 모호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단순히 환자와 비환자로 규정짓는 사이에 사라져버린 삶의 가치와 인간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는 수많은 삶의 가치를 배제하고 인간을 환자와 비환자로 규정짓는 것은 과연 온당할까?

미야노 마키코라는 일본 철학자는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아픈 사람의 정체성이 환자라는 점에 고정되는 순간 그의 앞에 놓인 인생의 수많은 가능성이 사라져버리며 주변 사람과의 관계 역시 환자와 보호자로 경직되어 의미 있는 관계 맺기가 불가능해진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인간이 하나의 점에 고정되지 않고 타인과 함께 세상에 자신만의 궤적을 그리며 살아가야 비로소 삶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현대의학과 병원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사회, 질병과 죽음에 대한 사유가 부족한 사회, 가치에 대해 무감각한 사회. 이런 사회에서 병원에 휘둘리지 않고, 환자가 아닌 병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또는 환자로 죽지 않고 사람으로 죽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람이 마지막까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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