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김범석]그래도 한일 관계가 움직이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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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한국 행사까지 챙긴 중진
한국 위해 싸우는 일본 시민들

김범석 도쿄 특파원
김범석 도쿄 특파원
2018년 8월 일본 외무성 4층 대회의실. 학계, 언론계 등 한국과 관련된 일본 내 인사들이 긴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양국 민간 교류의 활성화를 위해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던 프로젝트 ‘문화 인적교류 추진을 위한 전문가 회의’의 일본 측 회의 자리였다. 이들과 함께 앉아 있던 인물이 있었다. 이 회의를 발족시킨 고노 다로(河野太郞) 당시 외상이었다. 취재진에게 공개된 인사말에서 그는 “한국의 송강호라는 배우를 좋아한다. 그의 출연작들을 재미있게 봤다”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장관급은 일정이 바빠 대개는 모두발언만 하고 퇴장하지만 고노 전 외상은 이날을 포함해 총 4번의 회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 중 한 명이다.

당시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일본 총리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시기였다. 두 달 후 열린 기념 심포지엄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총리가 참석해 “(일본에서) 치즈닭갈비와 케이팝이 유행하고 있다”고도 했다.

한일 양국 사이의 분위기는 그해 10월 30일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양국의 인적 교류 회의는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고 아베 전 총리는 ‘한국 때리기’에 돌입했다. “한국과 단교”를 외치는 혐한 시위대는 주말마다 도쿄 도로를 점령했다.

2018년 5월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해 일본에서 3년 반을 취재한 기자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2018년 10월 30일을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양국 관계는 절망적이다”라고 보고 싶지 않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간극을 좁혀 보려는 일본인들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 7월 도쿄 신오쿠보 한인 타운에서는 도쿄 올림픽 개막을 응원하는 ‘한일 응원 현수막 공개’ 행사가 열렸다. 2층 높이의 건물 외벽에 응원 문구를 적은 간판을 공개하는 소규모 지역 행사에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을 지냈던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전 자민당 의원이었다. 행사를 주관한 재일본한국인연합회와의 인연 때문이지만 관방장관을 지낸 79세의 10선 중진 의원 출신이 소규모 지역 행사까지 챙기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당시 한 참석자는 “한인 상인들 기를 세워주러 온 것이다”라며 고마워했다.

이미 그는 재일한국인의 지방참정권 부여 추진, 전범 한국인 피해자 구제법안 마련 등 정치인으로서도 한국을 챙겨 왔다. 그런 그는 최근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안부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잘해 보려 했는데 미안하다”고 말했다.

거리 한복판에서도 한국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인을 대신해 외무성과 전범기업 본사 앞에서 500회 넘게 집회를 벌인 데라오 데루미(寺尾光身),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등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이다. 추운 겨울 콧물이 흐르고 입이 얼어붙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집회 현장에서 이들은 칼바람을 맞아 가며 일본 시민들에게 양국 간 과거사를 알리는 전단을 나눠 줬다. 힘들지 않은지 묻지만 이들은 “일본의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 외교가의 한 인사는 최근 양국 관계 개선에 대해 “일본도 (한국의) 대통령이 바뀔 것을 기다리지 말고 현재 (문재인) 정부 임기 내 해결을 봐야 한다”고 했다. 작지만 조금씩 양국 관계를 움직이려는 사람들이 하루빨리 결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김범석 도쿄 특파원 bsism@donga.com


#한일 관계#강제징용 배상 판결#한국 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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