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장택동]고스트 건

장택동 논설위원 입력 2021-06-04 03:00수정 2021-06-04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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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T-9 권총 80% 키트 799.99달러. 쉬운 조립. 설명서 제공.’ 미국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이런 상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총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완제품 총을 사려면 절차가 까다롭지만 부품이나 완성률 80% 이하의 키트는 총기로 간주하지 않아 구입에 제한이 없기 때문. 부품이나 키트를 사서 조립만 하면 아무런 기록이 남지 않는 ‘고스트 건(ghost gun·유령 총)’이 되기 때문에 미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DIY 총’이라고도 불리는 고스트 건은 1990년대에 등장했지만 이른바 밀덕(밀리터리 덕후)들의 취미 정도로 여겨졌다. 고스트 건에 대해 경고등이 켜진 건 2013년이었다. 범인을 포함해 6명이 목숨을 잃은 샌타모니카대 총기 사건에 고스트 건이 사용된 것. 이후 2019년 캘리포니아에서 16세 고교생이 같은 학교 학생 2명을 살해한 사건 등 고스트 건을 이용한 총기 사고가 잇따랐다. 미 법무부에 따르면 2016∼2020년 당국에 적발된 고스트 건은 2만3000정이 넘고, 고스트 건을 이용한 살인·살인미수 사건은 325건이나 된다.

▷총기 보유를 적극 옹호했던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총기 규제를 추진하고 있다. 그 핵심은 위험인물이 총기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붉은 깃발(red flag)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스트 건은 구매자에 대한 배경조사(background check)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주인이 위험인물인지 파악할 수조차 없다. 이에 미 정부는 총기 부품을 사기 전에 배경조사를 받게 하는 등 고스트 건을 규제하는 행정명령을 먼저 준비하고 있다.

▷다른 나라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고스트 건이 한국에도 처음 상륙했다. 자동차나 장난감 총의 부품이라고 속여서 해외에서 부품을 들여온 뒤 조립한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총을 만들면 적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치안당국이 긴장하고 있다. 파괴력도 강해 인명을 해칠 수 있다. 고스트 건이 범죄조직이나 흉악범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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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밤거리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한국은 세계적으로 치안이 안정된 나라로 꼽혀 외국인들이 부러워한다. 여기에는 총기를 금지한 것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런데 고스트 건을 막지 못한다면 한국은 ‘총기 청정국’이라는 명성을 잃게 되고 치안에는 큰 구멍이 뚫린다. 3D프린터로 총기를 만드는 기술도 이미 인터넷상에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총기 확산의 심각성을 깨닫고 전력을 기울여 막지 않는다면 영화에서나 보던 도심 총격전이 한국에서도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고스트 건#치안#총기청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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