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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진짜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일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우두머리 혐의 3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오상배 전 수방사령관 부관(대위)은 이 발언을 두 차례 했다. 처음은 비상계엄 당시 윤 전 대통령이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에게 전화로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라”고 지시하는 걸 들었을 때, 두 번째는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안 의결 뒤에도 윤 전 대통령이 “두 번, 세 번 계엄 하면 된다”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은 피고인석에 앉아 젊은 군 간부의 증언을 들었다. ▷오 대위는 윤 전 대통령의 변호인이 기자회견에서 “체포의 ‘체’ 자를 얘기한 적도 없다”고 말한 것을 듣고는 “배신감 같은 걸 느꼈고”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돼야겠다”는 마음에 검찰에서 진술하게 됐다고 했다. 앞서 조성현 수방사 제1경비단장, 김형기 특전대대장 등 현장 군 간부들도 헌법재판소나 법원, 검찰에서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런 증언들이 쌓여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고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윤 전 대통령은 전날 SNS를 통해 ‘국민께 드리는 호소’를 발표했다. 국민의힘 지도부의 기습적인 대선 후보 교체 시도가 당원들에 의해 제지된 직후다. ‘정당 민주주의의 파괴’란 비난을 받는 국민의힘의 단일화 논란에 대해 윤 전 대통령은 “여전히 건강함을 보여준 경선”이라는 상식 밖의 평가를 내놨다. 그러면서 “제 마음은 여전히 국가와 당과 국민에게 있다” “끝까지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에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을 당의 후견인으로 여기는 듯 보인다. ▷하지만 국민의힘 당원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조기 대선이 치러지게 된 것도, 국민의힘이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진 것도 윤 전 대통령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그런데도 윤 전 대통령은 이번 호소문에서 당원과 국민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 전 대통령의 행태가 대선을 목전에 둔 국민의힘에 점점 부담이 되고 있는 형국인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의 단결을 촉구하고 대선 승리를 외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이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은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일반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지상을 통해 법정에 들어오도록 법원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과 관련해 국민에게 할 말이 있느냐’는 등 취재진의 질문에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전날 ‘호기로운’ 호소문을 발표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윤 전 대통령이 진정 어린 사과를 할 게 아니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건진법사’ 전성배 씨는 지난 대선 당시 윤석열 캠프 네트워크 본부에서 ‘실세’로 불렸다. 이 본부 사무실을 방문한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직원들을 소개하는 동영상도 공개됐다. 하지만 무속인이 대선 캠프에 합류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배경은 뚜렷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김건희 여사의 소개가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전 씨의 측근은 2022년 김 여사가 전 씨에게 “남편이 대선에 나가니까 도와달라”고 제안했고, 이를 전 씨가 수락해 캠프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전 씨가 언제부터 김 여사와 알고 지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두 사람이 꽤 친분이 있었던 정황은 여럿 있다. 전 씨는 김 여사가 운영한 코바나컨텐츠의 ‘고문’이라고 적힌 명함을 갖고 있었고, 2015년 이 업체가 주관한 전시회 VIP 개막 행사에도 참석했다. 김 여사와의 관계를 발판 삼아 전 씨가 캠프에서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 당선 뒤 전 씨는 통일교 고위 간부 윤모 씨로부터 ‘김 여사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받았다고 한다. 전 씨와 김 여사가 가까운 사이라는 얘기가 퍼졌기 때문에 윤 씨가 접근했을 터다. 윤 씨는 ‘윤 전 대통령 부부를 따로 만났다’고 주장했고, 이를 토대로 캄보디아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추진하려 한 정황도 포착됐다.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국이다. ▷돌이켜보면 김 여사가 “내가 되게 영적인 사람이라 도사들하고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 녹음파일이 공개된 적이 있다. 김 여사는 윤 전 대통령도 “약간 영적인 끼”가 있다고 평했다. 이런 윤 전 대통령 부부의 성향 때문인지 무속인들과 관련된 게이트급 비리 의혹이 잇따랐다. 그중 한 명이 ‘지리산 도사’ 명태균 씨다. 명 씨가 윤 전 대통령 부부에게 김영선 전 의원 공천 등을 부탁했다는 의혹에 대한 수사는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두 사건 모두 진상 규명을 위해선 김 여사 출석 조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런 가운데 김 여사와 관련된 또 하나의 사건인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연루 의혹도 재수사가 이뤄지게 됐다.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검이 불기소 처분한 것에 대한 항고를 서울고검이 25일 받아들인 것이다. 검찰이 수사를 질질 끌다가 김 여사를 ‘출장 조사’할 때부터 공정성이 의심받았던 사건이다. 김 여사에게 유리한 진술을 했던 공범들이 말을 바꾸면 김 여사 재조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정부 내내 김 여사 관련 의혹들이 여기저기서 불거졌지만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권력’일 때는 묻힐 듯했던 일들도 결국엔 드러나는 게 세상 이치다. 김 여사도 예외일 수 없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헌법재판소에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지난해 12월 14일 국회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됐을 때부터 이달 16일 한덕수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후보자 지명 효력을 정지하는 가처분 인용까지 약 4개월 동안 헌재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고, 헌재의 결정들에 따라 정국이 출렁였다. ‘헌재의 시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헌재에 관한 별별 말들이 돌았다. 윤 전 대통령 탄핵심판을 놓곤 문형배·이미선 전 재판관 퇴임 전까지 결론을 못 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재판관들을 정치 성향에 따라 분류하면 인용하기에는 진보 측 재판관이 부족하고, 기각이나 각하를 하기에도 애매한 숫자라는 게 이런 분석의 근거였다. 선고가 늦어지자 마은혁 재판관 임명을 놓고 구여권과 야권이 극단적으로 대치한 이유이기도 하다.성향대로만 판단하진 않는 재판관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988년 헌재 설립 이후 한 명의 ‘우군’이라도 더 재판관으로 앉히려는 보수-진보 정치권 간의 물밑 싸움은 계속돼 왔다. 각 진영의 운명을 가를 결정적인 사건에서 재판관들의 ‘표 대결’이 벌어질 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한 대행이 대통령 몫 재판관 2명 지명을 강행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에 대해 만장일치로 파면 결정이 나온 것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서는 이런 계산법이 들어맞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2004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 10월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헌법소원은 인용되면 진보 진영에 타격이 불가피한 사건들이었다. 같은 재판관 9명이 심리했고, 많게는 7명이 보수 성향으로 분류됐다. 재판관들이 성향 그대로 의견을 냈다면 두 사건에서 같은 결과가 나왔겠지만 실제로는 탄핵은 기각, 헌법소원은 인용(위헌)이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도 비슷하다. 재판관 8명 중 적어도 5명이 보수 성향으로 평가됐다. 당시 청와대에선 이 중 3명 이상이 파면에 반대해 기각 결정이 나오길 기대했지만 결과는 만장일치 인용이었다. 사안의 성격과 중대성, 당시 여론의 흐름 등을 감안했을 때 이들 사건에서 헌재의 결정은 합리적이었다는 게 법조계의 중평이다. 이는 재판관들의 ‘집단지성’이 작동한 결과라고 본다. 물론 인용과 기각이 4 대 4로 팽팽하게 나온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심판처럼 재판관들의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취임 이틀 만에 탄핵소추된 이 위원장에 대해 예상보다 인용 의견이 많았다는 반응이 적지 않지만, 결과는 기각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각 재판관의 성향이 표출되더라도 이를 종합한 최종 결론이 상식의 궤에서 벗어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우군’ 심기 지양하고 헌재 존중해야 대법관과 함께 사법기관의 최고위직인 헌법재판관은 대부분 그에 걸맞은 능력과 연륜을 갖춘 인물들이 맡아 왔고, 밖에서 분류하는 성향대로 기계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더욱이 위헌 법률, 헌법소원, 탄핵, 권한쟁의 심판에는 재판관 6인 이상이 찬성해야 인용되는 ‘가중 정족수’가 적용된다. 재판관들의 중지가 모여야 결론이 나올 수 있게끔 만든 일종의 안전장치다.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에 각 3명씩 재판관 지명 또는 추천권을 배분한 현행 헌법의 방식이 이상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는 헌재의 자율성과 재판관들의 양식을 통해 편향 우려를 극복해 왔다. 진보-보수 정치권이 이를 존중하고 헌재의 중립성 강화 방안을 고민하지는 못할망정 더 극단으로 치우친 재판관을 심어 헌재를 내 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접길 바란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미국에는 전직 대통령이 아무리 후임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공개적인 비판을 삼가는 불문율이 있다. 200년 넘게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전·현직 대통령 간의 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오랜 전통이다. “나라를 하나로 묶고 정부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미 정치전문매체 ‘더힐’)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불문율이 흔들리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시도에 의해 우리의 삶이 압도된다면, 건국 이래 더 완벽한 연방을 위한 250년간의 여정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했다. 앞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에서는 ‘그건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평범한 시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트럼프를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는 분명하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도 “이 정부는 100일도 안 돼 너무나 큰 피해와 파괴를 가져왔다”며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세 사람 모두 트럼프와 이런저런 악연이 있기는 하다. 트럼프는 바이든을 향해선 “졸린 조”, 클린턴의 아내이자 2016년 대선에서 맞붙은 힐러리는 “사악한 힐러리”라고 부르며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오바마가 처음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미국 태생이 아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렸다. 그렇다고 유례가 없는 전직 대통령들의 동시다발적 현직 대통령 비난을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긴 어렵다. 트럼프에 대한 미국 사회의 반감이 심상치 않아서다. ▷트럼프가 보조금 중단을 무기로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등 ‘진보의 아성’으로 꼽히는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길들이려 하자 미 지식인들과 대학가가 들끓고 있다.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이민자 추방 정책에 보수 성향인 대법원이 ‘정부는 추방을 잠정 중단하라’며 제지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연방정부 직원들을 대규모 해고하면서 관가 분위기도 흉흉하다. 트럼프의 대표 정책인 관세 인상으로 시민들은 물가 상승, 기업들은 미국의 대외 이미지 하락에 따른 해외 영업 손실을 우려하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반(反)트럼프 시위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19일 워싱턴, 뉴욕 등 미국 700여 곳에 모인 시민들은 “창피하다” “왕은 없다”고 외치며 집회를 열었다. 미 전역에서 ‘핸즈오프(Hands Off·트럼프는 손을 떼라)’ 시위가 벌어진 지 2주 만이다. 미 갤럽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1분기(1∼3월) 지지율은 45%로, 1952년 이후 취임한 대통령들의 첫해 1분기 평균 지지율 60%보다 한참 낮다. 이대로라면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공화당 의원들이 ‘손절’에 나설 수도 있다. 국민을 이기는 정치는 없다. 트럼프가 끝까지 독주를 계속할지, 아니면 중간에 돌아설지는 미국인들의 손에 달렸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대통령 등 주요 공직자들에 대한 탄핵이 가능하다는 조항은 1948년 헌법 제정 이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제헌 헌법의 기틀을 잡은 유진오 박사는 해설서에서 탄핵의 조건에 대해 “형사 범죄의 경우에 한하지 않음은 물론이며, 대통령이 공포해야 할 법률을 공포하지 않았다든가… 하는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하는 사유가 있을 때”라고 썼다. 탄핵의 범위를 상당히 넓게 상정하고 탄핵 제도를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12건의 탄핵 사건 중 인용은 1건뿐이고 10건은 기각, 1건은 각하됐다. 헌법이나 법률 위반을 인정하면서도 기각한 사례가 적지 않아서다. 이는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에서 헌재가 제시한 “모든 법 위반이 아니라 공직자의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로 중대한 법 위반”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에 따른 것이다. 헌법에는 적시되지 않은 위헌·위법의 ‘중대성’이 실제론 파면 여부를 좌우하는 핵심 요건이라는 얘기다.“파면 효과 압도할 법 위반” 여부가 관건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는 더 엄격하게 중대성을 따진다. “파면 결정의 효과가 지대하기 때문에 이를 압도할 수 있는 중대한 법 위반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론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것이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거나,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배신해 국정을 담당할 자격을 상실한 경우” 탄핵안을 인용할 수 있다는 게 헌재의 판례다. 대통령 위헌·위법 행위의 정도와 반복될 가능성, 국민의 신뢰를 계속 받을 수 있을지를 따져 결정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그렇다고 ‘중대성’이 넘지 못할 높은 벽은 아니라는 게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의 결과였다. 당시 헌재에선 훗날 형사 재판에서 중형이 확정된 뇌물수수, 직권남용 등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업들에 미르재단 등에 출연하도록 요구했고(기업 경영의 자유 등 침해), 최순실 씨의 국정 개입을 허용했으며(공익실현 의무 등 위배), 진상 규명 협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헌법 수호 의지 불분명)는 이유로 대통령을 파면했다. 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도 같은 기준에서, 박 전 대통령에 버금가거나 무거운 ‘국민 신임 배신’이나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가 있었는지가 준거점이 될 것이다. 먼저 헌법과 계엄법상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행정 및 사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상황에서 계엄을 선포했는지에 관해선 법조계에서 부정적 의견이 많다. 계엄 선포 전 필수 절차인 국무회의에 대해서도 참석자 대부분이 ‘하자가 있었다’고 했다. 朴 탄핵 인용 기준이 尹 선고의 준거점 계엄 실행 과정에서는 헌법이 보장한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권 행사를 막기 위해 국회에 군을 투입하고 경찰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했는지가 관건이다. 윤 대통령은 적극 부인했고 일부 군 사령관들은 헌재에선 침묵했지만,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한 일선 군경 간부들이 여럿 있다. 법조인들은 진술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은 증언을 하면 신빙성을 높게 평가한다. 정치 활동 전면 금지 등이 담긴 포고령의 위헌성도 간과할 수 없다. 헌법재판관들은 저울의 한쪽에 탄핵 인용에 부합하는 요소들을, 다른 한쪽에는 대통령 파면이 가져올 효과를 올려놓고 세밀하게 법익을 계량해서 각자의 의견을 정했을 것이다. 법리와 증거가 복잡한 데다 정치 세력들의 희망이 섞인 전망까지 더해져 다양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보통의 상식을 가진 다수의 시민이 수긍할 만한 결정문을 내놓는다면 헌재의 오랜 고민이 헛되지 않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김성훈 대통령경호처 차장과 이광우 경호본부장에 대한 영장실질심사에 검사가 불참한 것을 놓고 정치권과 법조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들의 영장은 “범죄 혐의에 다퉈 볼 여지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21일 법원에서 기각됐는데, 검사가 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해서 구속 필요성을 주장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마지못해 이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던 검찰이 일종의 ‘태업’을 한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김 차장과 이 본부장은 경호처 내에서 대표적인 ‘강경파’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경찰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방해하고, 경호처가 관리하는 비화폰 서버에서 군 사령관들의 통화 기록을 삭제하려 한 혐의 등으로 김 차장에 대해 3차례, 이 본부장에 대해 2차례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도주나 증거 인멸 우려 등이 없다’며 번번이 기각했다. 이에 경찰의 신청으로 6일 열린 서울고검 영장심의위원회에서 ‘영장을 청구하는 게 타당하다’고 권고한 뒤에야 검찰은 법원에 영장을 청구했다. ▷경찰이 수사를 주도하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건의 영장실질심사에 검사의 참석 여부는 사안의 중대성에 달려 있다. 경찰이 일상적으로 넘기는 사건은 검사가 영장실질심사에 불참하기도 하지만, 이번처럼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라면 검사가 직접 챙긴다는 것이다. 내란 혐의로 영장이 청구된 조지호 경찰청장은 물론 ‘음주 뺑소니’ 사건으로 영장이 청구된 가수 김호중 씨 등은 경찰이 수사했어도 검사가 심사에 들어갔다. 고위 검사 출신의 법조인은 “심사에서 검사에게는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주지만 경찰관은 판사가 묻는 것에만 답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검사가 참석하면 구속 사유를 입증할 기회가 늘어나는 셈이다. ▷법원이 발부한 윤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을 경호처가 막아서면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및 경찰과 대치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던 게 두 달 전이다. 비화폰 서버에 계엄 당시 벌어진 일들에 대한 단서가 남아 있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국민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지목된 두 사람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영장실질심사였다. 어떤 과정을 거쳐 영장을 청구하게 됐든 심사에 참석해 최선을 다하는 게 검찰의 기본 아닌가. ▷더욱이 윤 대통령 구속 취소 결정에 대해 검찰이 항고를 포기한 것을 놓고 ‘봐주기’라는 비판 여론이 일었고, 그 여진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황이다. 계엄 선포 직후 대검 과장급 간부가 방첩사 대령과 통화한 것 등을 놓고 ‘검찰도 뭔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미묘한 시점인 만큼 검찰이 계엄 관련 사건에서는 더욱 신중했어야 했는데, ‘나 몰라라’ 식의 행보로 의혹과 논란을 키운 결과가 됐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의 정당성과 내란죄 적용의 부당함을 주장한 논리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비상계엄 선포는 야당의 줄탄핵과 일방적 예산 삭감, 광범위한 부정선거 등으로 인해 국가가 비상사태에 처했으므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말한다. 계엄 이후 상황에 대해선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발언이 핵심이다. 국회 봉쇄, 계엄 해제 요구안 표결 저지, 정치인 체포 등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국헌 문란은 없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범죄는 실질적 피해가 발생했을 때 성립한다. 윤 대통령의 주장처럼 국회가 완전히 마비되거나 정치인이 체포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2시간 반 만에 계엄이 해제됐으니 결과적으로 별문제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일부 있을 듯하다.내란죄는 위험범… “목적 달성과 무관” 하지만 이는 내란죄가 ‘위험범’, 즉 법익이 침해될 위험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성립되는 범죄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대법원은 내란죄의 성격에 대해 “국헌 문란 목적으로 다수인이 결합해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폭행·협박 행위를 하면 기수(범죄의 완성)가 되고, 그 목적의 달성 여부는 무관하다”고 판시했다. 따라서 국회 등 국가기관이 실제로 전복되지 않았더라도 헌정질서가 무너질 위험이 발생했다면 내란죄가 성립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더욱이 법원은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요소로서 폭행·협박을 “최광의(가장 넓은 의미)”로 해석했다. “일체의 유형력 행사나 외포심을 생기게 하는 해악의 고지”가 있으면 폭행·협박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폭행은 사람뿐 아니라 물건에 대한 물리력 행사도 포함된다(신동운 ‘형법각론’). 또 대법원은 ‘전두환·노태우 내란 사건’ 판결에서 1980년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관해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에게 기본권이 제약될 수 있다는 위협을 주는 측면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내란죄의 협박이 있었다고 했다. 그만큼 인정되는 범위가 넓다는 얘기다. 이번 계엄은 어땠나. 국회 경내에는 군용 헬기와 무장 병력이 투입됐고, 선관위에도 군이 들이닥쳤다.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면서 군은 유리창을 깨고 국회 본관에 진입했다. 윤 대통령은 ‘경비와 질서 유지’를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현장에 있던 이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을 것이다. 이에 더해 포고령에는 영장 없는 체포·구금·압수수색, 언론과 출판 통제 등 기본권을 제약하는 내용이 여럿 있다. 물리력이 행사됐고, 다수의 국민이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법원, 폭행·협박을 폭동으로 넓게 인정 계엄이 합헌·합법적으로 이뤄졌다면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기 위해 계엄군이 일부 투입되는 건 용인될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국회에 군을 보낼 근거는 없다. 포고령으로 국회·정당을 포함한 정치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 더욱이 지난해 12월 3일이 계엄법상 선포 요건인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돼 행정 및 사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상태였나. 공직자 탄핵과 예산 삭감이 도를 넘었다고 해도 정치로 풀어야 할 영역이다. 법적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계엄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6조 원 이상이라고 한국은행은 추산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측이 평가하는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추락했다. 계엄 이후 증폭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데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윤 대통령이 아무리 부인해도 이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2·3 비상계엄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군을 동원해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표결을 막고 정치인들을 체포하려 했는지는 탄핵심판의 최대 쟁점이다. 윤 대통령 측은 헌법재판소 변론에서 “의원 아닌 요원을 끌어내라 한 것”, “체포가 아니라 동향 파악”이라며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현장에 출동했거나 사령관들의 지시를 받았던 일선 지휘관들은 윤 대통령 측의 주장과 상반되는 증언을 쏟아내고 있다.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이 ‘대통령이 문을 부숴서라도 국회의원을 끄집어내라, 필요하면 전기도 끊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21일 국회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국조특위)에서 나온 이상현 특전사 1공수여단장의 발언이다. 이 여단장은 “대통령 지시 사항이라고 부하에게 전달은 했지만 당혹스러웠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당시 있었던 일을 “수첩에 다 기록하고, 수정할 수 없게 볼펜으로 써 검찰에 제출했다”고 한다. ▷이 여단장이 곽 전 사령관의 전화를 받을 때 차에 함께 있던 1공수 작전참모도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대통령님 지시’라는 단어가 기억난다”고 했다. 방첩사 방첩부대장은 곽 전 사령관이 긴장해서 전화를 받길래 다른 간부에게 물어보니 ‘코드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앞서 조성현 수방사 1경비단장은 헌재에서 “이진우 전 사령관으로부터 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이들이 모두 입을 맞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여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정치인 체포 지시에 관한 증언도 이어지고 있다. 구민회 방첩사 수사조정과장은 국조특위에서 “(김대우 전 수사단장이) 체포한다는 지시와 명단을 불러줘서 받아 적었다”고 증언했다. 김 전 단장도 앞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체포 대상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잡아서 수방사로 이송시켜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줄줄이 명령이 하달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출동한 방첩사 요원들은 포승줄, 수갑 등을 지참했다. 누가 봐도 동향 파악 차원의 움직임은 아니다. ▷계엄 포고령의 절차적 하자 문제도 제기됐다. 계엄 포고령은 대통령이 서명한 계엄 공고문을 토대로 작성해 계엄사령관 결재, 대통령 재가를 거치도록 규정돼 있는데 당시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대통령) 서명이 들어간 포고령 1호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정해진 절차를 건너뛴 채 정치활동 전면 금지 등이 포함된 포고령을 발표했다는 얘기다. ▷계엄 당시 특전사, 수방사, 방첩사 사령관에게서 명령을 하달받은 일선 지휘관과 간부들은 준장, 혹은 대령이나 중령 계급으로 현장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기소된 사령관들에 비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날 상황을 꾸며낼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들의 잇단 증언에 대한 군 통수권자의 입장은 뭔가.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3년여 전 헌법재판소가 내놓은 결정으로 법조계가 술렁인 적이 있다. 성폭력 피해 미성년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재판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성폭력처벌법 조항이 위헌이라는 내용이다. 결국 어린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 나와 진술해야 한다는 것이어서 ‘2차 피해’ 우려가 제기됐다. 그럼에도 헌재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녹화 과정에서 피고인 측이 반대신문을 할 수 없으므로 “방어권 제한의 정도가 매우 중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만큼 한국의 사법체계에서는 방어권을 중시한다.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권리 등이 방어권의 구체적 내용이다. 방어권이 강조되다 보면 수사와 재판에 차질이 생길 수 있고,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권리를 우선시한다는 지적이 나올 소지도 있다. 하지만 “공정한 형사절차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기방어를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게 대법원 판례이고, 이에 대한 이견은 찾아보기 어렵다.체포 거부도, 재판 지연도 ‘방어권 차원’ 그런데 최근 윤석열 대통령 주변에서 분출되는 ‘방어권 보장’ 요구는 도를 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란죄 수사 초기부터 피의자로서의 방어권만 강조하며 체포와 구속에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체포영장 2차 집행을 앞두고 대통령실에서 “시민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자기 방어권을 보장해 달라”고 한 게 압권이었다. 방어권이 중요한들 적법한 영장 집행을 막는 명분이 될 순 없다. 윤 대통령 측은 요즘엔 헌재가 탄핵심판 변론기일을 한꺼번에 지정한 것 등을 방어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피청구인으로서의 방어권에 집중하는 양상이다. 국가인권위원회까지 ‘헌재가 탄핵심판에서 적법 절차를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며 가세했다. 이럴 만큼 윤 대통령의 방어권은 취약한가. 윤 대통령은 고위직 전관 출신을 포함한 대규모 변호인단의 조력, 여당과 대통령실의 지원 사격 등 겹겹이 보호를 받으면서 체포 적부심, 구속 취소 청구 등 다양한 제도를 꼼꼼하게 활용하고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검찰의 출석 요구 거부, 체포 뒤에도 진술 거부 등 피의자의 권리를 넘치도록 행사했다. 헌재에서도 윤 대통령이 의견을 밝히는 데 별 제약이 없다. 그래도 부족하다고만 한다.권력자 아닌 약자를 지키는 방패 돼야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측의 방어권 주장도 지나친 측면이 있다. 이 대표 역시 변호인단과 민주당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다. 공직선거법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뒤 소송서류를 송달받지 않고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아 항소심을 늦췄다. 그럼에도 “정당한 방어권 행사”라며 1심 판결의 근거가 된 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대권 가도에 차질이 없도록 항소심 선고를 늦춰 보겠다는 게 속내일 텐데, 이를 방어권으로 포장한 셈이다. 방어권은 지위 고하와 무관하게 인정되지만, 방어권이 소중한 근본적 이유는 막강한 국가의 형벌권 앞에서 약자인 시민의 방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방어권 뒤에 숨으려는 듯한 행태를 보이는 건 방어권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직무가 정지됐어도 현직인 윤 대통령, 원내 제1당의 ‘일극’인 이 대표라면 ‘나에 대한 방어권은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진상을 규명하자’고 나서야 하지 않겠나. 유능한 변호인을 구할 능력도, 법률 지식도 부족해 꼭 필요한 방어권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힘 없고 가난한 서민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느낄 박탈감을 생각해서라도 여야 정치 지도자와 그를 돕는 이들이 함부로 방어권을 입에 담지 말았으면 한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검찰 재직 당시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등 혐의로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을 기소했던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6일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 회장에게 적용한 19개 혐의에 대해 2심에서도 ‘모두 무죄’ 판결이 나오자 고개를 숙인 것이다. 2020년 9월 이 원장의 주도로 검찰이 “판례, 증거관계, 사안의 중대성” 등을 강조하며 기소를 밀어붙인 지 3년 반 만이다. 그런데 발언의 내용을 짚어 보면 뒷맛이 개운치 않다. ▷먼저 뭘 사과한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이 원장이 사과한 직접적인 대상은 “국민”과 “공판업무를 수행해 준 후배 법조인들”이었다. 정작 본인이 기소한 사건으로 100차례 넘게 공판에 출석하며 고통을 겪은 이 회장과 피해를 당한 삼성그룹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또 자신이 “기소 결정을 하고 논리를 만들고 근거를 작성”했는데 “법원을 설득할 만큼 단단히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과한다”고 했다. 기소가 잘못됐다기보단 탄탄하게 기소하지 못한 게 문제라는 취지로 들린다. 과연 그런가. ▷검찰에서 이 사건을 수사할 당시 무리한 수사라는 지적이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삼성 계열사 등을 50여 차례 압수수색하고 관련자 110여 명을 조사하는 등 저인망식 수사를 펼쳤는데도 이 회장을 비롯한 삼성 경영진에 대한 구속영장은 줄줄이 기각됐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서 10 대 3의 압도적 의견으로 수사 중단과 불기소를 권고했을 때라도 받아들였어야 했지만 거부하고 기소를 강행했다. 결국 재판에서는 단 하나의 혐의도 인정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 대한 이 원장의 사과는 없었다. ▷나아가 이 원장은 “사법부가 법 문헌 해석만으로는 주주 보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며 법률 개정을 주문했다. 법의 미비, 법원의 소극적 해석으로 유죄 판결을 받지 못했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지만 핑계로 비칠 뿐이다. 법률이 어떻게 돼 있든 검사는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사안만 기소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사건에서 검찰이 압수한 디지털 자료들이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아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했고, 그럼에도 항소심 재판부는 핵심 증거 229개를 살펴본 뒤 무죄라고 결론 내렸다. 검찰의 수사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법률 탓, 법원 탓으로 돌릴 계제가 아니다.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발이 묶인 9년간 삼성의 글로벌 이미지는 실추되고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기업에 국한된 게 아니라 국가 경제 전체에 타격을 준 일이다. 검찰의 수사팀장이었던 이 원장이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도 사과인지, 변명인지 모를 발언을 내놓는 걸 보니 책임의 무게를 느끼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강변하며 ‘통치행위론’을 꺼내 든 것은 퇴진 거부 방침을 분명히 밝힌 지난달 12일 담화에서였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권 행사는 사면권, 외교권 행사와 같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통치행위”라는 것이다. 사법의 영역을 넘어선 결단이므로 탄핵이나 수사·재판의 이유로 삼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후 윤 대통령 측은 통치행위를 명분으로 수사 절차를 거부했지만, 법원의 체포·구속영장 심사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 측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변론에서 계엄 선포는 “헌법 질서 수호를 위한 최후 수단”,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이라고 강조하며 통치행위론을 반복하고 있다. 헌재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탄핵안이 각하될 수도 있기 때문에 윤 대통령으로선 포기할 수 없는 카드라고 여길지 모른다.외교권·사면권과 계엄선포권은 다른 차원 하지만 그동안의 헌재 결정과 법원 판결을 살펴보면 ‘계엄=통치행위’라는 주장은 허상에 가깝다. 윤 대통령이 언급한 ‘외교권’ 사례는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에 관한 헌법소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헌재가 통치행위로 보고 각하한 유일한 사례다. 헌재는 국방·외교에 관련된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점과 함께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를 지켜 이뤄진 것임이 명백”하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번 계엄은 어땠나. 지금까지 나온 진술과 정황으로 보면 흠결이 한둘이 아니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표결을 막기 위해 국회에 병력을 투입했다는 점이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졌고, 계엄 선포 전 국무회의는 허겁지겁 진행하다 국무위원들의 부서 없이 끝났다. 계엄 건의는 총리를 거치지 않았고, 계엄 선포문 공고 절차도 없었다.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에 대해선 “사면권자의 고도의 정치적·정책적 판단에 따른 ‘시혜적’인 조치”라고 본 대법원 판례가 있다. 그렇지만 형량을 줄이거나 복권해 주는 사면과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계엄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실제로 헌재는 금융실명제 실시, 신행정수도 건설법, 개성공단 전면 금지 조치 등에 관한 헌법재판에서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직접 관련된다”는 이유로 통치행위가 아니라 심판 대상이라고 했다. 이런 점들은 언급하지 않은 채 통치행위가 광범위하게 인정되는 듯이 말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이다.판결문 앞뒤 자르고 유리한 부분만 부각 나아가 일부 여권 인사는 ‘전두환·노태우 내란 사건’ 판례를 통치행위론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제시한다. 앞뒤 자르고 유리한 부분만 떼어낸 일종의 기만이다. 판결문에는 “비상계엄 선포·확대는 고도의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지닌 행위”라면서도 “국헌 문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해진 경우에는 범죄에 해당하는지 심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결국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을 보면 어디에 방점이 찍혔는지는 자명하다. 계엄 포고령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더 적극적이다. 정치활동 목적의 집회·시위 금지, 언론·출판 검열, 영장 없는 수색·구속 등을 규정한 유신 계엄 포고령은 “위헌이고 위법해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번 포고령에도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다. 계엄선포권이나 긴급재정경제명령권 같은 국가긴급권은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이고, 헌법에 정해진 대로 사용했는지 사법적으로 판단하는 게 마땅하다. 다시 말해 계엄선포를 무조건 통치행위로 인정해 사법 심사에서 배제한다면 굳이 헌법에 발동 요건과 절차를 명시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런데도 계속 통치행위론을 방패처럼 앞세우는 것은 어떻게든 계엄의 책임을 회피해 보겠다는 말이나 다를 게 없어 보인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박종준 전 대통령경호처장이 10일 전격적으로 경찰에 출석하고, 사직까지 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닷새 전만 해도 “대통령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신명을 바칠 것”이라며 호위무사를 자처했던 그다. 윤석열 대통령 변호인단도 박 전 처장 출석 직후 “처장 복귀 시까지 차장이 직무를 대행한다”고 공지했다. 그가 돌아올 것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 체포를 둘러싼 대치 와중에 경호처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세간에서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은 두 차례 출석을 거부했던 박 전 처장이 왜 갑자기 사표를 낸 뒤 경찰에 나왔을까 하는 점이다. 뭔가 계산된 행보라고 보는 이들은 박 전 처장을 먼저 체포한 뒤 윤 대통령 신병 확보에 나서려는 공수처와 경찰의 계획을 흔들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한다. 반면 세 번째 출석 요구에도 불응하면 경찰의 체포영장 신청이 유력한 상황에서 체포를 피하고 경호처장으로서의 심적 부담을 덜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는 11일에도 경찰에 출석한 뒤 “최대한 성실히 협조하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경호처 내의 ‘강경파’에 박 전 처장이 밀린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야당에선 “경호처에도 김건희 여사의 총애를 받는 한남동 십상시가 있다” “김용현·김성훈·이광우는 한 몸”이라며 김성훈 경호차장, 이광우 경호본부장을 ‘김건희·김용현 라인’으로 지목한다. 공채 출신인 두 사람은 윤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근접 보좌해 왔다. 반면 박 전 처장은 지난해 9월부터 4개월 정도 처장으로 재직해 왔을 뿐이다. 8일 윤 대통령이 관저를 둘러봤을 때도 두 사람이 박 전 처장보다 먼저 알고 경호관을 배치했다고 한다. ▷공채 출신으로 경호처의 또 다른 핵심으로 꼽히는 이진하 경비안전본부장도 11일 경찰에 출석했다. 그는 체포영장 집행을 막은 것은 “윗선의 지시를 전달한 것일 뿐”이라며 책임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TOP 4’로 불리는 수뇌부가 각자도생을 택한 마당에 경호처 직원들이 동요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경호처 직원들만 접속할 수 있는 내부망에 “체포영장 집행을 방해하는 행위는 공무집행 방해에 해당할 수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가 삭제되는가 하면 경호처 직원이 보냈다는 “춥고 불안하다”는 등의 메시지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평소 경호 대상의 그림자처럼 임무를 수행하는 경호처는 “하나 된 충성 영원한 명예”를 처훈(處訓)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충성의 대상인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의 피의자가 된 데다 핵심 간부들이 누구 라인이네 하는 등의 잡음이 흘러나오면서 경호처 직원들은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경호처 직원들을 ‘사병’처럼 이용해 버티는 윤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불러온 것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비상계엄 사태가 한 달 가까이 지나면서 검찰, 경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간에 벌어졌던 내란죄 수사권 혼란은 일단락되고 있다. 쟁점은 공수처와 검찰에 수사권이 있는지 여부였지만, 법원은 수사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다. 공수처가 청구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검찰이 청구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모두 발부한 것이 단적인 예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 측은 수사를 미루거나 피할 수 있다는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심지어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마저 “불법” “무효”라며 생떼를 쓰고 있다. 체포영장은 항고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방법이 없다. 발부되면 일단 집행하고, 필요하면 구속영장 심사나 본재판에서 문제가 있는지 짚어보는 것이다. 신속성, 은밀성이 요구되는 체포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26년간 검사로 재직하며 숱하게 체포영장을 청구하고 발부받았던 윤 대통령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방어권 차원이라고 주장하더라도 현직 대통령이라는 신분과 사안의 중대성에 맞게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무작정 버티는 ‘내란 수괴’ 피의자 尹 그동안 공수처의 출석 요구에 불응했던 과정도 치졸하다. 관저에 숨은 채 ‘수취인 불명’ ‘수취 거절’이라는 이유로 출석요구서를 무시하면서 “공수처에는 내란죄 수사권이 없다” “수사보다는 탄핵심판이 우선”이라는 등의 주장으로 여론전만 펼쳤다. 이런 피의자를 그냥 두고 볼 수사기관은 없다. 더욱이 최고 형량이 사형인 내란 우두머리(수괴) 혐의 당사자를 조사하지 않는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얘기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 측이 공수처 수사를 거부하는 명분으로 드는 것은 공수처법상 수사 대상 범죄에 내란죄가 없다는 것이다. 공수처법에는 ‘공수처가 수사하는 범죄와 직접 관련성이 있는 죄’도 수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에 따라 공수처는 직권남용 관련 범죄로 윤 대통령의 내란죄를 수사하고 있고 법원도 적법하다고 인정했는데, 윤 대통령 측만 애써 귀를 막고 있는 셈이다. 공수처법상 수사 가능한 범죄에 내란·외환죄가 명시돼 있었다면 이런 불필요한 논란의 빌미마저 주지 않았을 것이다. 공수처법은 17개의 직위·직군을 수사 대상자로 적시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대통령이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에 대해 확실하게 수사가 가능한 범죄는 내란죄와 외환죄뿐이다. 이들 범죄가 공수처 수사 범위에 포함되는 게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데, 현행법에는 빠져 있다. 형사사법 체계 보완은 차후의 문제 이는 2021년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출범, 2022년 ‘검수완박법’ 통과로 형사사법 체계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검찰 중심으로 이뤄지던 수사 시스템을 바꿔 검찰은 직접 수사를 최소화하고, 고위공직자의 주요 비리는 공수처에서 담당하며, 나머지 범죄는 경찰에 맡기는 방식으로 재정비했다. 그 과정에서 각 기관의 수사권을 입법적으로 세심하게 정리하지 못하다 보니 공수처법에서 내란죄가 누락되는 결과가 됐다고 본다. 윤 대통령을 비롯한 내란 관련자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만큼 법원의 판단을 받아 가면서 진행하면 될 일이다. 다만 45년 만의 비상계엄 선포와 내란 사태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법리적 논란이 벌어진 만큼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차후에 총체적으로 점검할 필요는 있다. 불명확한 형사사법 체계로 인해 수사에 혼선이 생기거나 절차적 하자가 발생해 사법정의 실현이 지체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4일 새벽 비상계엄 해제를 위해 의원들이 모인 국회 본회의장 화면을 지켜보면서 ‘곧 계엄군이 들이닥쳐 난장판이 되리라’고 걱정한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표결은 순탄하게 진행됐고 계엄은 실패로 끝났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의아했다. 이번 계엄 실행을 위해 최소 1500명의 장병이 동원됐다는 점이 밝혀졌다. 게다가 특수전사령부 산하 707특수임무단과 제1공수특전여단,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특임대 등 내로라하는 최정예 부대가 투입됐다. 방첩사령부, 정보사령부 요원들과 경찰도 가세했다. 국회의 표결을 막기에 충분한 병력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수사와 증언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특전사, 수방사, 경찰에 수차례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독촉했다.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항명죄로 다스린다’며 엄포를 놨다고 한다. 대통령과 장관의 성화에도 장병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전 계엄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였다.‘항명죄’ 엄포에도 움직이지 않은 장병들 1980년 광주의 계엄군 중 상당수는 한강 작가가 적었듯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런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군인들은 강압, 인식론적 한계, 축소된 책임 등 세 가지 범주에서 변명을 내놓는다고 제프 맥머핸 옥스퍼드대 교수는 분석한다. 군인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 잘못된 행동인 줄 몰랐다, 또는 정신적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과거 계엄군들의 생각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라면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2024년 서울의 계엄군은 아무리 명령이라도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눠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식했고 실천했다. 여기에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헌법의 힘이 작용했다고 본다. 윤 대통령 스스로 “예산 폭거” “입법 독재” 등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처럼 이번 계엄이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됐다는 점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헌법상 계엄 선포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 계엄 선포권의 근간이 되는 국군 통수권은 헌법이 정한 대통령의 핵심 권한이지만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행사돼야 한다고 헌법에 적혀 있다. 헌법상 군 통수권의 한계와 군의 중립성 더욱이 헌법에는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명시돼 있다. 종합하면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으로 군을 움직여 중립성을 훼손하는 것은 헌법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은 ‘군의 정치적 중립’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실제론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개정된 현행 헌법에 새로 들어간 조항이다. 그전까지 11차례 계엄이 선포되고 3차례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국군이 국민을 해치는 비극이 벌어졌다. 군부독재하에서 고통받은 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이들의 피와 눈물이 쌓여 헌법에 반영됐다. 계엄령에 따라 긴급 출동한 장병들이 헌법을 떠올릴 겨를이 있었겠냐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헌법 조항을 세세하게 아는 이들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장의 군인들은 헌법에 부합하는 행동을 했고, 그 덕분에 헌법 규정에 따른 계엄 해제가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헌법이 작동한 결과가 됐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긴 세월에 걸쳐 헌법의 가치가 개개인의 의식에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게는 대통령이 앞장선 계엄을 주저앉힐 만큼 무겁다. 이제 군을 동원해서 권력을 쥐어보겠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세상이 됐다. 혼란과 충격의 와중에 건진 희망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엄마, 내 이야기를 널리 알려주세요.” 9월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던 12세 소녀 샬럿 오브라이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부모는 딸의 방에서 메모를 발견했다. 집단 따돌림으로 힘들어하던 샬럿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것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였다. 샬럿의 아버지는 “너무 잔인해서 전할 수 없는 최악의 말들”이 담긴 SNS 메시지를 읽은 날 밤 딸이 세상을 등졌다고 했다. 이 사건은 청소년 SNS 사용에 대한 호주 사회의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호주 상원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부모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16세 미만 청소년의 SNS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내년 말 시행되는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X(옛 트위터), 스냅챗, 틱톡이 규제 대상에 포함될 예정이다. 이들 업체가 청소년의 이용을 막을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면 최대 4950만 호주달러(약 450억 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법이 너무 광범위하다”(틱톡) 등 업체들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SNS는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다. 매일 3시간 이상 SNS를 사용하는 청소년은 우울증과 불안을 겪을 확률이 2배 높다는 미 보건당국의 보고서도 있다. 이에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국가들이 늘고 있다. 프랑스는 15세 미만은 부모의 동의 없이 SNS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도입했고, 미국 플로리다주는 내년부터 14세 미만은 SNS 계정을 만들지 못하도록 할 방침이다. 노르웨이, 영국 등도 청소년의 SNS 사용을 일부 제한 중이다. ▷한국에서도 SNS에 빠진 아이들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 최근 4년 새 SNS에 자살 유발 정보가 올라왔다는 신고가 9배 이상 늘었고, 이는 아동·청소년 자살률 증가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SNS가 다른 불법 행위로 이어지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청소년들이 SNS에 올라온 광고에 혹해서 온라인 도박에 빠지거나 마약을 구매하는 식이다. 딥페이크 범죄는 피의자의 70% 이상이 청소년인데, 대부분 SNS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퍼뜨리다가 적발됐다. 그럼에도 SNS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할 적극적인 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호주가 만든 법의 실효성에 대해선 반론이 만만치 않다. 자녀가 부모 이름으로 SNS에 가입하는 등 편법을 쓸 수 있고, 폐해가 더 심각한 다크웹으로 옮겨가는 청소년이 늘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교육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 유튜브 등이 규제에서 빠진 것도 한계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이 법이 완벽하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게 옳다는 것은 안다”고 했다. 시행착오를 무릅쓰고서라도 시작하겠다는 얘기다. 우리도 깊이 새겨볼 만한 대목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에 경의를 표한다.” 2020년 10월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을 때 이 대표가 한 말이다. 4년여가 지난 이달 15일 다른 사건으로 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가 인정돼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받자 이 대표는 “국민 여러분도 상식과 정의에 입각해서 판단해 보면 충분히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판결이 상식과 정의에 어긋난다는 얘기다.“사법 살인” 법원에 독설 쏟아낸 野 민주당의 반응은 훨씬 원색적이다. 판결 이튿날인 16일 장외집회에선 “미친 판결” 같은 격한 반응이 나왔다. 이어 18일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사법 살인”, “(담당 판사가) 서울 법대 나온 게 맞냐” 등 수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 판결 이전부터 민주당은 검찰독재대책위원회, 사법정의특별위원회 등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여론전에 나섰고, 이 대표 지지자들은 100만 장이 넘는 ‘무죄 탄원서’를 무더기로 법원에 냈다. 판결 당일에는 지도부와 지지자들이 법정 안팎에 대거 집결했다. 사법부에 대한 압박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민주당은 6월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사건 1심 재판에서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판사의 선입견, 독선과 오만” 등 비난을 쏟아냈다. 민주당이 여론전을 펼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 대표 판결이 부당하다는 주장에 더 많은 시민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법원도 이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법원을 향한 과도한 독설과 압력이 반복되면 오히려 반감이 커질 공산이 크다. 민주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지지자들은 25일 열리는 이 대표 위증교사 1심 재판부에도 112만 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냈다. 국민의힘은 이런 민주당을 “판사 겁박”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실제론 민주당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판결이 나오기 전부터 한동훈 대표는 “판례를 따르더라도 유죄”라고 했고, 주진우 의원 등은 “징역 1년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며 구체적인 양형까지 언급했다. 유죄를 선고하라고 법원을 압박한 것으로 비치기에 충분하다. 여당 의원들이 이 대표 재판을 생중계하라며 법원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이번엔 실형” 압박 수위 높이는 與 이 대표가 선거법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여당은 더욱 기세가 오른 모양새다. 위증교사 재판에서는 실형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바로 법정 구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당내에는 어제 ‘재판 지연 방지 태스크포스’를 설치했다. 민주당처럼 별도 기구를 동원해 여론에 호소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이지만 이 역시 여당이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당의 모습을 보니 이 대표 선거법 판결 뒤 “사법부 판단에 경의를 표한다”고 한 것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헌법은 ‘법관은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야는 이 대표 재판을 놓고 경쟁하듯이 법관의 ‘양심’을 흔들고 ‘독립’을 훼손하려 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은 재판의 당사자가 되면 법정에서 증거와 법리를 놓고 다툰 뒤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항소와 상고를 통해 상급심의 판단을 받아볼 뿐, 법정 밖에서 법원을 어찌해 보겠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한다. 이게 건전한 상식이고 법치의 기본일 텐데, 두 정당은 국민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중국 외교부가 한국인의 무비자 입국을 내년 말까지 허용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주중 한국대사관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전격적이었다. 무비자 입국은 통상 별도의 협정을 맺거나 상호주의 조치로 이뤄진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한국과 별다른 협의 없이 ‘일방적 무비자 정책’을 당장 8일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더욱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이 간첩 혐의로 체포돼 양국 간에 냉기류가 흐르는 상황에 일어난 일이어서 해석이 분분하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의 인적 교류는 꾸준히 늘어나 2016년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의 절반 이상이 중국인이었고, 한국인이 방문한 해외 국가의 4분의 1가량이 중국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사드(THAAD) 배치를 빌미로 중국 정부가 한한령(限韓令)을 내린 데 이어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덮치면서 한중 간의 왕래는 끊기다시피 했다. 지난해 다소 회복됐지만 한국에 입국한 중국인, 중국을 찾은 한국인 모두 2019년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현 정부 들어 양국의 외교 관계도 순탄치 않다. 대미 외교에 중점을 두는 한국 정부에 대해 중국의 불만이 커지면서 주한 중국대사가 “중국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날로 치열해지는 양국 간의 기술 경쟁도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요소다.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에서 일했던 삼성전자 출신 한국 교민이 반(反)간첩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를 놓고 국내에서 “이래서 중국을 못 믿는 것”, “중국 스파이 색출하자” 등의 목소리가 분출하는 시점에 나온 중국의 무비자 입국 허용 조치를 관광사업 활성화 차원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반중 정서 확산을 바라지 않는 중국 정부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외교가에선 최근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을 우려하는 중국에 한국은 매력적인 견제 카드가 될 것으로 본다. 미 대선 이후 중국에 대한 견제가 강화될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한시라도 빨리 한국과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선 조변석개하는 중국의 태도가 미덥지 못한 게 사실이다. 국제정세가 바뀌면 중국이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다만 이번엔 중국이 한국을 향해 손을 내민 만큼, 우리로서도 한동안 등한시했던 중국과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는 있다. 한국 역시 북-러 밀착을 견제할 방안을 고민 중이고,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대중 수출을 활성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중국의 속내가 어떻든 이를 활용해 우리의 국익으로 연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특별감찰관 후보를 추천할 것인지를 놓고 국민의힘이 거센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지난달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 간의 면담이었다. 한 대표가 ‘김건희 여사 리스크’ 대응을 위해 특별감찰관을 임명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윤 대통령은 ‘야당의 북한인권재단 이사 추천이 먼저’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윤 대통령이 사실상 한 대표의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회동 이틀 뒤 한 대표는 조건 없이 특별감찰관 후보 추천을 진행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에 친윤(친윤석열)계로 분류되는 추경호 원내대표가 “원내 사안”이라고 맞서면서 친윤-친한(친한동훈)계 간에 본격적으로 전선이 형성됐다. 여당은 조만간 의원총회를 열어 논의할 방침인데 의견이 모이지 않으면 표결에 부칠지, 의총 내용을 공개할지 등을 놓고 양측이 연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미 ‘심리적 분당’ 상태라는 관측까지 나오는 상황이 됐다.후임자 임명은 법적 의무인데도 방치 사실 특별감찰관 임명은 늦어도 현 정부 초반에는 매듭지어 졌어야 할 문제다. 특별감찰관 결원 시 30일 안에 국회가 후보자 3명을 추천하고 대통령이 1명을 임명하는 것은 법에 명시된 의무다. 하지만 2016년 9월 이석수 초대 특별감찰관이 물러난 뒤 박근혜 정부는 후임을 정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5년을 흘려보냈다. 이를 비판했던 국민의힘으로 정권이 교체됐고 대통령직인수위는 특별감찰관을 곧 가동할 것처럼 얘기했다. 그러더니 윤 대통령 취임 20일 만에 특별감찰관 임명 방침을 놓고 대통령실에서 엇갈린 말이 나왔고 지금까지 흐지부지돼 왔다. 다만 특별감찰관을 임명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특별감찰관이 김 여사 리스크의 해법이 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 전 특별감찰관이 실세 중 실세로 꼽혔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감찰하면서 주목을 받았지만, 특별감찰관의 권한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다. 감찰 대상은 대통령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 대통령실 수석 이상으로 정해져 있고 통화 내역 조회 등 강제적 수단을 통한 수사는 할 수 없다. 감찰할 수 있는 비리 유형도 금품 수수 등 5가지로 한정돼 있다. 특별감찰관이 있어도 김 여사가 누구와 무슨 통화를 하는지 파악할 방법이 마땅치 않고, 김 여사 라인으로 꼽히는 비서관과 행정관들은 감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제 와 ‘김 여사 리스크’ 해법 될지 의문 이런 한계에도 윤 대통령 취임 직후 특별감찰관이 가동됐다면 김 여사 스스로 말과 행동을 경계하도록 하고, 문제의 소지를 조기에 발견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개입 의혹은 이미 수사가 일단락됐고 공천 개입 의혹 등은 고발된 상태여서 지금 특별감찰관이 임명된들 어찌해 볼 여지가 없다. 또 특별감찰관 추천에 합의한다 해도 후보자 물색 및 임명 과정, 새 특별감찰관이 인력을 선발하고 체계를 갖추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윤 대통령 재임 중에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대단한 해결책을 발견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친한계, 어떻게든 막아내려는 친윤계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특별감찰관에 대한 소신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도권 싸움을 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김 여사 문제가 커질 만큼 커졌는데도 진작 했어야 할 특별감찰관 임명조차 합의하지 못한 채 계파 간 다툼에 헛심을 쓰고 있는 현실이 현 여당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이들이 업무를 계속할 수 있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연임은 조직 운영에 매우 긴요합니다.”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출석한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은 읍소를 거듭했다. ‘이들’은 공수처의 이대환 수사4부장, 차정현 수사기획관, 송영선·최문정 검사를 가리킨다. 윤석열 대통령이 27일까지 연임안을 결재하지 않으면 3년의 임기가 끝나 공수처를 떠나야 할 처지였다. 윤 대통령은 이들의 임기 만료를 불과 53시간여 앞둔 이날 오후 6시 23분경에야 연임을 재가했다. ▷공수처 4부에는 세간의 관심이 큰 사건들이 여럿 몰려 있다.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외압 의혹,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 마약 사건 세관 직원 연루 의혹 사건 수사 등 대통령 부부나 대통령실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들에다 ‘고발 사주’ 손준성 검사장 공소 유지까지 맡고 있다. 그런데 4부에 검사는 이 부장검사와 평검사 1명뿐이어서 차 기획관이 수사를 돕고 있다. 이번에 연임이 무산됐다면 평검사 1명이 대형 사건들을 도맡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공수처 검사의 임기는 기본 3년에 세 차례 연임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 연임을 하려면 공수처 인사위원회가 적격 여부를 심의·의결한 뒤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들은 8월 13일 인사위 심의를 통과했다. 이후 두 달이 넘도록 대통령실에서 연임안을 붙들고 있었다는 얘기다. 재가가 미뤄지는 동안 업무에 집중력이 떨어져 수사에 차질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사실 이번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공수처 내부에서는 검사 임기가 너무 짧아 ‘임시직’이라는 말이 나왔다. ‘임기 3년에 연임 3회 가능’이라는 안은 2017년 10월 법무부가 내놓은 공수처 설치 방안에 등장한 뒤 법률에 반영됐다. 일반 검사는 정년까지 임기에 제한이 없고 7년마다 적격 심사만 받는 것과 대비된다. 당시에는 너무 권한이 큰 공수처가 탄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법무부가 공수처법의 신속한 통과를 위해 이런 안을 제시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수처의 인력 수급을 어렵게 만들고 독립성을 취약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됐다. ▷현재 공수처 검사는 처장, 차장을 포함해 16명이다. 이달 말 1명이 그만둘 예정이어서 실제론 정원 25명 가운데 사실상 10명이 결원 상태다. 그런데 공수처가 지난달 요청한 검사 3명 신규 채용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의 재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공수처가 대통령 부부와 관련된 수사를 여러 건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검사 연임과 충원을 자꾸 미루면 인사권을 무기 삼아 공수처를 압박하려 한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헌법재판소가 헌법재판소법 조항에 대해 위헌 취지로 결정한 사례는 1988년 설립 이후 단 3건뿐이다. 2건은 한정위헌결정을 따르지 않은 법원 판결이 헌법소원 대상이 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세 번째가 이달 14일 나온 심리정족수에 관한 가처분 인용 결정이다. 헌법재판관 9명 중 7명 이상이 참석하지 않으면 심리를 못 열게 돼 있는 조항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킨 것이다. 17일 국회 몫 재판관 3명이 퇴임하는데도 후임자 임명이 이뤄지지 않자 자구책을 취한 셈이다. 헌재가 정족수 규정에 대해 ‘셀프 결정’을 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입법을 통해 정비하는 게 바람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재판관 공백을 불러온 국회의 책임부터 물어야 한다. 이는 ‘재판관의 임기 만료일까지 후임자를 임명해야 한다’는 헌재법을 엄연히 어긴 것이다. 그러고선 더불어민주당이 “헌재 스스로 입법 행위에 준하는 결정을 했다”고 지적한 것은 적반하장이다. 야당 탓만 하며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보여온 국민의힘도 도긴개긴이다.재판관 선출 기한 넘긴 與野의 위법 이번 결정으로 헌재가 심리는 이어갈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헌재의 기능은 마비된 것이나 다름없다. 헌재의 핵심적 역할인 법률 위헌 결정, 헌법소원 인용, 탄핵 결정 등을 하려면 재판관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지금처럼 재판관이 6명만 남아 있어도 결정을 내릴 수는 있지만, 실제론 한 명이라도 결원이 있는 상태에선 주요 사안에 대한 판단은 가급적 미룬다. 한 명의 의견에 따라 위헌과 합헌이 갈릴 수 있으므로 ‘완전체’가 아닌 상태에서 이뤄진 결정에 대해선 정당성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해서다. 결국 당장 이번 달부터 헌재의 주요 결정은 이뤄지지 않게 됐다. 그만큼 헌법에 어긋나는 법률이 유지되는 기간은 길어지고 기본권 침해를 구제받는 것은 늦어져 국민이 헌법재판을 받을 권리를 행사하는 데 차질이 빚어진다. 문제는 이번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재판관 공백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재판관은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가 각각 3명을 지명 또는 선출한 뒤 임명되는데 이번처럼 국회 몫이 제때 채워지지 않는 일이 잦다. 2018년에는 여야 간 이견으로 한 달가량 재판관 3명이 충원되지 않았고, 2011년 조대현 전 재판관 퇴임 후에는 1년 2개월간 공백이 빚어졌다.제도 개선해 공백 생길 여지 없애야 지금대로라면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이를 막을 제도적 개선책이 시급하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방안이 독일, 스페인처럼 후임 재판관이 임명되지 않았을 경우 임기가 만료된 재판관이 직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국회에서도 이런 취지의 헌재법 개정안이 수차례 발의됐지만 재판관 임기를 6년으로 규정한 헌법에 어긋나는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면서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제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헌재가 멈추는 것을 막기 위해 법률에 의해 재판관 퇴임 시기를 임시적으로 미루는 것은 헌법의 취지나 목적의 정당성에 비춰 용인할 수 있다고 본다. 국회 몫 재판관 3명에 대한 추천권을 정당별로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등도 명문화된 규칙으로 정할 필요가 있다. 계속 관례에 맡겨두면 재판관 교체 때마다 여야 간에 갈등이 빚어질 소지가 있다. 각 당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탄핵 심판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의 헌재 결정을 미루기 위해 고의적으로 재판관 선출을 미룰 우려도 있다. 이런 꼼수를 시도할 여지조차 남겨둬서는 안 된다. 국회가 헌재를 멈춰 세울 권한은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