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의 힘[2030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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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한화생명 신사업부문 마케터
김지영 한화생명 신사업부문 마케터
나이를 먹으며 수다를 잃었다. 시간이 뜰 때면 용건 없이 전화해 “뭐 해?”로 시작하는 통화를 기본 30분 넘게 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별것 아닌 고민으로도 전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밤새 떠들고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남자친구가 남편이 되어서일까, 그 옛날의 단짝 친구가 결혼을 해서일까. 대상이 애매해진 까닭도 분명 있지만 그보다는 수다 자체의 효용을 믿지 않게 된 탓이 크다.

수다의 속성은 통상 하소연이다. 슬픈 깨달음이지만, 나약한 소리는 하지 않을수록 좋다. 부정적 감정은 쉬이 전염되므로, 내가 듣기 싫은 만큼 상대 또한 듣기 싫을 확률이 높다. 더군다나 소위 책잡힐 거리를 굳이 널리 알릴 이유도 없다. 결국엔 나의 약점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습득했다.

부정적 감정마저 기꺼이 들어주고 책잡을 유형도 아닌 다정하고 선량한 상대라 할지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소연일랑은 하지 않게 되었다. 기껏해야 한 해에 몇 번 주고받는 안부인데, 귀한 상대일수록 기왕이면 상대도 나를 유쾌하게 기억했으면 했다. 굳이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뭣보다 수다는 그 자체로 상당한 비용을 요했다. 같은 1시간이면 수다 떨 시간과 에너지로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조금 더 어른의 계산에 맞았다.

그러다 얼마 전,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우울의 늪에서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창밖에는 비가 퍼붓고 있었다. “나 실은… 오늘 너무 힘들어.” 운을 떼자 친구가 답했다. “아, 너는 오늘이 그런 날이구나. 나도 실은 엊그제….” 우리는 밀린 수다를 정산하듯 오랜 시간, 전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었다. 전화를 끊을 때 즈음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양 내가 말했다. “야, 이게 되네?”

수다가 위로가 되더라. 한동안 간과했던 수다의 힘. 나를 평가하지 않을 다정한 타인과의 대화는 얼마나 따뜻한가. 뻔하지만 진실한 위로가 주는 울림은 얼마나 뻔하지 않은가. 친구도 덩달아 경이로워하며 맞장구를 쳤다. “너랑 이렇게 수다 떨고 나니까 살 것 같아.” 전화를 끊자 거짓말처럼 비도 그쳤다. 그밖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기분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사실은, 모든 게 달라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스스로 강제했던 정서적 자립은 한편 고립이기도 했다는 것을. 나의 불행이 흘러넘치지 못하게 세워두었던 벽은 한편 나를 향해 흘러오는 마음들에 벽이기도 했다는 것을. 내가 힘들다 말하는 대신 괜찮다 말하기를 택했기 때문에 상대 또한 괜찮아야만 했고, 내가 기대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도 내게 기댈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수다 맹신론자가 되어 툭하면 통화 버튼을 누른다. 짧게나마 조잘조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마음을 듣고 들려주다 보면, 왜인지 서로가 기특하다. 기꺼이 먼저 짐이 됨으로써, 상대 또한 내게 기대도 좋음을 서로에게 주지시킨다. 어쩌면 진짜 배려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서 참 다행이다.

김지영 한화생명 신사업부문 마케터
#수다#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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