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장택동]백신 지식재산권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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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AIDS) 치료제는 1990년대부터 있었지만 정작 상황이 심각했던 아프리카 국가에선 이용하기 어려웠다. 환자 1명당 연 1만 달러가 넘는 약값은 빈국 주민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비쌌다. 특허권 때문에 사람이 죽어간다는 비난이 커지자 세계무역기구(WTO)는 2001년 보건 비상상황에서 예외적으로 특허권을 일시 면제할 수 있다는 내용의 도하선언을 채택했다. 이 합의 이후 치료제 생산이 크게 늘면서 약값이 뚝 떨어졌다. 20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19 백신을 놓고 비슷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 백악관이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지식재산권 면제를 검토 중이라고 27일 밝혔다. 지난해 10월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WTO에 이를 제안했지만 그동안 선진국들이 찬성하지 않아 논의가 지지부진했다. 또 미국 정부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2000만 회분을 인도에 공급하고, 캐나다 멕시코에 총 400만 회분을 지원하기로 했다. 국방물자생산법까지 발동해 백신의 해외 유출을 막던 미 정부가 태도를 바꾼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 러시아의 파상적인 백신 외교가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약 90개국에 자국산 백신을 수출하거나 지원했고 국경 분쟁을 벌이고 있는 인도에도 백신 지원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도 약 70개국에 러시아산 백신을 공급했다. “중국 러시아와의 백신 외교 전쟁에서 서방국들이 졌다”(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세계 최강국 미국은 체면을 구기게 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8일 “미국이 다른 나라들을 위한 백신의 무기고가 되겠다”며 전의(戰意)를 다졌다. 미국으로선 백신 외교의 실패가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 악재가 될 수 있어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16%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공급받은 백신은 전 세계 생산량의 2%에도 미치지 못하는 반면 전 세계 인구의 16%인 부국들은 백신의 53%를 가져갔다. 이런 상황인데도 미국이 계속 백신을 움켜쥐고 있다가는 비난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맞게 될 공산이 크다.

▷선진국들의 백신 자국 우선주의에 대해 많은 지적이 있었지만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자국민을 먼저 챙기는 것을 비판할 수만은 없다. 국민을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정부의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더라도 언제든 다른 팬데믹이 닥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외교적 해법, 지재권 면제 등에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건, 안보 등 국가·국민의 존망과 직결되는 분야일수록 자강(自强)의 토대 위에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모색해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에이즈#백신#지식재산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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