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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수습만 하려는 나라에 국격은 없다[현장에서/최지선]

입력 2020-09-04 03:00업데이트 2021-01-2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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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해 “(뉴질랜드에) 사과할 수 없다”고 말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 사진공동취재단
최지선 정치부 기자
‘2년 9개월.’

뉴질랜드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외교관 A 씨의 성추행 의혹 사건이 벌어진 뒤 흐른 시간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사건 발생 2년 9개월 만인 2일 외교부에 조사와 구제 과정이 미흡했다는 내용의 결정문을 송부했다.

인권위는 A 씨가 뉴질랜드인 피해자에게 한 신체 접촉을 성희롱으로 인정하고 A 씨가 피해자에게 1200만 원을 지급하라고 권고했다. 외교부에는 재외공관에서 성 비위가 발생했을 때 제대로 조사하고 처리하는 매뉴얼이 없다며 이를 만들라고 권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시키는 조치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성 비위 무관용 원칙’을 강조해온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는 큰 오점으로 남게 됐다.

성추행 의혹이 한국과 뉴질랜드 간 외교 갈등으로 번지게 된 것은 외교부가 사건을 쉬쉬하면서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사건이 벌어진 지 3년이 다 되도록 피해자가 납득할 만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성 비위를 부차적 문제로 치부해 외교 실패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7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통화를 요청해 예고 없이 이 사건의 해결을 요구했다. 외교부는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고 비판했지만 아던 총리는 통화 전날 자국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한국 정부가 개입해 줄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외교적 망신을 샀는데도 외교부는 관련 내용을 공개하기를 꺼렸다. 애초 외교부가 사건의 전말을 제대로 공개하고 피해자 구제 의사를 밝혔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뉴질랜드 피해자 측은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사건 처리 과정과 결과를 피해 당사자도 제대로 전해들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측은 “성추행 문제를 제기한 뒤 A 씨가 2018년 2월 아시아 국가 공관으로 이동할 때도 그가 공관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1차 사인 중재 때도 외교부의 어떤 설명도 들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무관용 원칙을 강조했다던 외교부에 성희롱 대응 매뉴얼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피해자가 또 한 번 절망하고 있다”고도 전했다.

강경화 장관은 최근 국회에 출석해 ‘국격’의 문제라며 피해자와 뉴질랜드 정부에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외교부가 이 사안을 피해 구제가 아닌 수습 대상으로만 보고 쉬쉬한 것이 일을 키웠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타국의 피해자가 겪은 사건이 우리의 감수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해도 피해자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투명하게 밝히는 게 ‘진짜 국격’이 아닐까.

최지선 정치부 기자 auri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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