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체제 처형 방식 은밀히 바뀐다[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주성하 기자 입력 2020-08-06 03:00수정 2020-08-0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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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에서 곡식을 수확하고 있는 북한 군인들. 북한은 일부 군부대에 군량미를 조달받을 농장을 지정해 직접 수확하게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도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어렸을 때 북에서 ‘림꺽정’이란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 월북 작가 홍명희 소설에 기초해 1987∼89년 5부작으로 제작된 림꺽정은 당대 최고 배우들이 출연했고,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의 지시로 림꺽정과 ‘안중근 이등박문 쏘다’라는 영화가 비공식적으로 상영이 금지됐다. 림꺽정은 온갖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민초의 반란을 다뤘고, 안중근은 수뇌 암살을 영웅적 행위로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4년 전쯤 북한은 과거에 만든 영화 10여 편을 시청 및 유포 금지 대상으로 공지했다. 대부분 외국 생활을 보여줬거나, 반란을 다뤘거나, 주요 배우가 숙청된 영화들이었다.

림꺽정은 주제가까지 금지 리스트에 올랐다. 림꺽정의 주제가를 들으면 누구라도 북한의 현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1절은 “구천에 사무쳤네 백성들의 원한소리/피눈물 고이었네 억울한 이 세상/산천아 말해다오 부모처자 빼앗기고/백성의 등뼈 갉는 이 세상 어이 살리”라고 시작된다. 3절 후렴은 “나서라 의형제여 악한 무리 쓸어내고/가슴에 쌓인 원한 장부답게 풀어보자”라고 대놓고 반항을 선동한다. 북한 당국이 두려워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영화와 노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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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강화도에서 건너다보이는, 림꺽정의 실제 활동 무대였던 황해남도 연안군 한 농장에서 지난해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발단은 군량미 수탈이었다. 각 농장에 할당한 군량미가 제대로 걷히지 않자 북한은 아예 군부대에 논밭을 나눠주고 직접 수확해 가져가도록 했다. 열심히 농사를 지었던 농민들은 가을에 다 여문 벼를 강제로 빼앗겼다. 연안군은 곡창지대지만, 아사 사건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곳이다. 산간지대 농촌은 산에 개인 텃밭이라도 몰래 일굴 수 있지만, 평야지대에는 개인 경작을 할 땅이 없는 상태다.

졸지에 한 해 수확물을 모두 빼앗긴 농민들은 분노했다. 이 중 한 개 분조 7명이 외통길(한 군데로만 난 길)에 드러누워 벼를 싣고 가는 군용차들을 막아섰다. 다 빼앗기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우리를 깔고 지나가라는 것이었다. 영화 림꺽정도 농작물을 모두 빼앗겨 분노한 사람들이 수탈하러 나온 양반들을 죽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북한에서 당의 지시를 거부하고 군량미 제공에 반대해 실제 행동에 옮긴 것은 반정부 시위와 다름없는 심각한 정치적 반항이다. 놀랍게도 이들은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다. 오히려 농장 관리위원회 간부들이 나와 일을 잘 해결해 주겠다고 달래 농성을 풀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이들에 대한 처벌이 없어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일은 나중에 일어났다. 3월 초까지 불과 몇 달 사이에 군용차를 막았던 7명 모두가 앓다가 죽거나 객사한 것이다. 북한은 원래 부검이나 사인 공개 같은 것도 없는 곳이다. 내막을 아는 사람은 이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살해됐다고 믿고 있다. 죽은 이들이 워낙 주위의 주목을 받던 터라 소문도 빠르게 퍼졌다.

연안 사건은 최근 북한의 처형 방식이 새롭게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에 군법이 적용돼 2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700명 이상 처형됐는데, 이들도 공개처형이 아니라 비밀처형됐다. 북한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포심을 심어주는 공개처형을 선호했는데, 이제는 수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북한 체제가 대중의 눈치를 볼 만큼 허약해졌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공개처형을 마구 하다가 처형자와 심정적 분노를 공유하는 군중 심리가 폭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밀처형도 소문이 퍼지기 때문에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공포를 주려는 의도를 넘어 진짜로 ‘불순분자’를 없애지 않으면 저항 정신을 누를 수 없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북한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 커지자 목격자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이 이유가 가장 타당해 보인다.

숙청, 비밀경찰, 공개처형, 비밀처형…. ‘인민의 천국’ 공산주의로 간다는 달콤한 유혹에 속았던 나라들에서 보았던 행태들이다. 그러나 동유럽과 소련(현 러시아)은 30년 전에 청산한 유혹의 대가를 북한은 너무도 오래, 잔인하게 치르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체제#김정은#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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