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물교환이 통일부의 상상력인가[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주성하 기자 입력 2020-08-20 03:00수정 2020-08-20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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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소 500마리를 싣고 북한으로 향하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이 소들을 받지 말라는 지시를 어겼다는 죄로 서성원 북한 중앙수의방역소장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남북관계를 창의력과 상상력을 갖고 접근하겠다”고 말하며 취임한 지 거의 한 달이 돼간다. 그러나 그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장관 취임 이후 통일부는 8억 원 규모의 코로나19 방역물품의 대북 반출을 승인하고 세계식량계획(WFP)에 1000만 달러(약 118억 원)를 지원했다. 이런 지원은 새삼스러운 게 없다. 오히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외부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만 창피하게 됐다.

그나마 북한의 인삼술 들쭉술을 남한의 설탕과 맞바꾸는 사업의 승인 여부가 화제가 되긴 했다. 이 장관이 청문회에서 “백두산 생수와 남한 쌀 교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과 일맥상통한 사업이다.

그런데 북한이 이런 물물교환을 창의력과 상상력 있는 신선한 돌파구라고 생각할까. 평생 북한을 지켜본 필자 생각으로는 “무슨 자본주의 소꿉놀이하자는 것이냐”며 화를 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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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공동연락사무소까지 폭파하고는 바로 물물교환에 응하면 김정은이 얼마나 우스워지겠는가. 북한은 김정은의 자존심과 체면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곳이다. 또 북한이 인삼술과 들쭉술을 팔 곳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닐 거라 믿고 싶지만 혹시나 물물교환 정도를 창의적이고 상상력 있는 돌파구라고 생각한다면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발상이라 생각한다.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꽉 막혔을 때는 22년 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떼를 몰고 올라가 금강산관광 사업을 성사시킨 일 정도는 벌여야 창의적 돌파구라고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때도 북한이 선뜻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공개하는 내용이지만 오히려 소 떼 방북을 막으라는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북한 중앙수의방역소 서성원 소장(당시 55세)이 고문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 소장은 “소가 들어오면 방역에 이상이 없다 해도 아무 트집이라도 잡아 소들을 되돌려 보내라”는 보위부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 남북관계는 바로 얼어붙는다.

서 소장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다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사건인데 어떻게 이상이 없는 소들을 트집 잡아 훼방을 놓겠는가. 나중에 삼수갑산 가더라도 소신대로 한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소 떼 방북을 성사시키고 한 달 뒤 서 소장은 갑자기 들이닥친 검은 승용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반년이나 소식이 끊겼다.

서 소장은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와 대학 동창이었다. 부인이 남편을 살리겠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김경희의 차를 가로막고 호소한 끝에 서 소장은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반년 만에 서 소장은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됐는데, 더 비참한 것은 집안 식구를 봐도 벌벌 떨고, 먹고 싶은 것도, 아픈 것조차 말하지 못하는 정신 이상에 걸려 있었다. 서 소장은 어디에 끌려갔는지, 누구한테 고문을 받았는지도 모른 채 집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숨졌다.

북한은 소 떼를 1차로 받은 지 석 달 뒤 “안기부와 통일부의 반민족 분자들이 소들에게 소화될 수 없는 불순 물질들을 먹여 500마리 중에 15마리가 죽고 8마리가 죽기 직전”이라며 비난했다.

이처럼 옛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북한을 상대할 때 우리의 잣대로만 평가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시장경제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는 흔히 “이 정도의 경제적 이익을 보게 하고, 성의를 보이면 북한도 고마워하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북한에선 지도자의 체면이나 외부 정보 차단, 전략적 판단 등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 거래의 방법도 우리 상식과 다르다. 대북사업을 성사시키려면 상대 기업에 얼마나 이익을 주는지 설득하기보다는 기업 책임자의 인사권을 쥔 윗선을 찾는 게 성공할 확률이 높다. 윗선에 1억 원의 뇌물이 들어가면 국영기업은 2억 원 손해 볼 수 있는 것이 북한식 계산법이다.

물물교환이 성사되면 김정은 주머니에는 얼마가 들어갈까? 그에게 떨어지는 것이 없으면 설탕 받고 좋아할 인민이 천만 명이라도 의미가 없다.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면 북한식 계산법 정도는 꿰고 있어야 한다.

술과 설탕, 또는 생수와 쌀을 바꾸는 것은 사장이 할 일이지 장관이 매달릴 일은 아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운운할 문제도 아니다. 그런 걸 하라고 통일부가 존재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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