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원하기 때문에’의 종착점[오늘과 내일/김광현]

김광현 논설위원 입력 2020-06-04 03:00수정 2020-06-04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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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무능력·부도덕 정책입안자들 “일단 쓰고 보자”
상환 계획 엉성한 국가채무 급증, 선순환 보장 못 해
김광현 논설위원
뜻하지 않은 이유로 경영 사정이 어려워지면 기업의 경우 비용을 줄이거나, 가지고 있는 자산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거나, 그것도 어려우면 외부에서 빚을 낸다. 뒷골목에서 빌리는 사채(私債)가 아닌 다음에는 대출기관에 상세한 채무상환계획서를 제출하고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한다. 빌린 돈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해서 돈을 번 다음 언제부터 다시 갚겠다는 내용이다.

정부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코로나19처럼 비상사태가 벌어져 민간에서 생산 소비가 줄고, 수출이 막혀 해외 부문에서 절벽이 생기면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이를 메우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부의 상환 계획이 막연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당대에 갚을 생각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은행 대출 같으면 당장 퇴짜 맞을 수준이다.

정부가 어제 3차 추경 35조3000억 원을 편성했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영화 ‘기생충’의 대사처럼 정부도 나름의 계획이 있다. 이른바 ‘선순환론’ ‘좋은 채무론’이다. 정부가 마중물을 풀어 소비와 소득을 올리면 생산과 일자리가 늘고, 경제 규모가 커지면 재무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제는 여권에서조차 언급을 꺼리는 소득주도성장 구조와 흡사하다. 두 논리 모두 현실성과 속도가 문제다.


상환계획서대로 빚을 갚지 못한 기업은 부도가 나고 개인은 신용불량자가 된다. 순환 고리가 어디서 어긋나면 국가도 어려운 지경에 처할 수 있다. 주인이 있는 기업은 망하면 끝장이라는 절박함이 있지만 정치인들은 자신의 임기 때만, 혹은 다음 선거 때까지만 국민들이, 유권자들이 좋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런 도덕적 해이가 알게 모르게 소위 정치 지도자라는 인사들에게 만연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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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이 더 없다면 올해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43.5%가 된다. 현 정부 출범 전인 2017년 36.0%였던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빠른 증가 속도다. 엊그제 열린 한국경제학회에서는 이 추세대로 가면 2028년에는 80%까지 오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어려움에 처한 나라로 그리스 아르헨티나 등을 꼽는데 이 국가들도 한때는 튼튼한 재정을 자랑했다. 그리스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가채무 비율이 20%대였다. 1981년 사회당 파판드레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이 원하는 것은 들어줘야 한다”는 기치 아래 복지 분야에 마구 돈을 풀었다. 채무비율은 3년 만인 1984년 40.1%로 급상승했다. 다시 1993년 100.3%까지 가는 데 불과 9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후 늘 재정위기에 시달렸다. 결국 2010년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처지가 됐다.

빚이 늘어나는 것은 순식간이고 한번 준 복지는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은 전 세계 공통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파판드레우 이상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정치인들이 부쩍 많아졌다.

재정을 곳간에 쌓아두면 썩는다고 말할 정도로 무식해서 용감한 정치인들과 달리 선배들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있고 전문가적 양심을 갖춘 기획재정부 관료들도 이제 지쳤는지 당청에서 쏟아내는 무리한 요청에 무기력한 반응이다. 최근 만난 한 전직 고위 관료는 “후배들이 이제 지쳤는지 당이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거의 포기한 것 같은 분위기”라고 전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무모한 계획은 두 가족 몰살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이어진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정치논리를 앞세운 무모한 국가 재정 운용의 비극은 한두 가족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3차 추경#국가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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