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1005억 원[오늘과 내일/정원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7일 03시 00분


코멘트

7년 전의 추징금 완납 약속 지키고… ‘5·18 폄훼·왜곡’ 법정서 사과해야

정원수 사회부장
정원수 사회부장
“제보자가 ‘내일 한강에 집채만 한 고래가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2013년 9월 4일 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징금 수사를 취재하던 후배 기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제보 내용을 알려왔다. 전 전 대통령의 차남 재용 씨가 그 다음 날 1672억 원의 잔여 추징금 완납 세부계획서를 들고 검찰에 출석한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7월부터 시행된 이른바 ‘전두환 특별법’(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으로 당시 검찰은 대규모 압수수색을 하며 전 전 대통령 측을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돈이 없어 못 낸다’며 1997년 확정 판결 이후 16년 동안 추징금 완납을 거부하던 전 전 대통령 측이 먼저 추징금 완납 의사를 밝히리라고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바다가 아닌 한강에 고래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반신반의했지만 같은 달 10일 장남 재국 씨가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공개하면서 이 제보 내용은 사실로 밝혀졌다. 재국 씨는 “추징금 환수 문제와 관련해 그간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데 대해 가족을 대표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했다. 이어 “부친은 저희가 할 수 있는 한 당국 조치에 최대한 협조하라고 말씀하셨고, 저희도 그 뜻에 부응하고자 했으나 해결이 늦어진 데 대해 대단히 송구하게 생각한다”며 머리를 숙였다.

재국 씨가 당시 검찰에 제출한 추징금 자진 납부 목록에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사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입 자금이 전 전 대통령의 불법 자금인지를 직접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마지막에 목록에 넣었다고 한다. 당시 검찰 수사팀 관계자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정리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아직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입장문 발표 이후에도 666억5000만 원의 추징금만 더 걷혔을 뿐이다. 지금까지 2205억 원의 추징금 가운데 54.4%인 1199억5000만 원만 추징됐고, 여전히 절반 가까운 1005억5000만 원이 미납 상태다.

시간을 끈다고 추징금 납부 의무에서 벗어날까. ‘전두환 특별법’으로 추징금의 소멸시효는 3년에서 10년으로 늘어나 있다. 추징금이 1원이라도 집행되면 그 시점으로부터 자동으로 시효가 10년 더 길어지는 것이다. 검찰은 재국 씨가 주주인 출판사에서 2022년 10월 30억 원을 추징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최소 2032년 10월까지 추징금 납부 의무가 유효하다는 의미다. 올해 89세인 전 전 대통령이 101세까지 생존하더라도 추징금을 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국회에서는 전 전 대통령의 사후에도 추징금을 계속 환수하기 위한 ‘제2의 전두환 특별법’ 입법 움직임까지 있다.

전 전 대통령 측은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내용의 회고록을 2017년 4월 펴냈다. 이듬해부터 추징금 완납 약속을 뒤집고 부인과 며느리, 전 비서 등의 명의로 된 연희동 사저에 대한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는 불복 소송을 하고 있다.

궁지에 몰렸을 때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예전처럼 고개를 든다면 누가 그 진정성을 믿어주겠나. 지금이라도 23년 동안 해묵은 과제인 추징금 완납부터 해결하고, 5·18 명예훼손 관련 법정에서 광주 시민들에게도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접을 수 있었던 기회를 여러 번 걷어찼던 전 전 대통령에게는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 자세를 더 낮추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 있다. 옛말대로 ‘높은 곳에서는 추위를 이길 수 없다(高處不勝寒)’.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전두환 전 대통령#추징금#5·18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