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다 줄 거면 기부할 권리도 함께 주자[광화문에서/유재동]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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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차장
유재동 경제부 차장
긴급재난지원금 100만 원(4인 가족)을 받는다면 이걸로 뭘 할까 궁리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하나둘씩 생기고 있다. 코로나19로 생활이 어려워진 건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생계엔 지장이 없는 여유 있는 사람들 얘기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전 국민 지급을 주장하고 있어서 총선만 끝나면 부자들의 이런 ‘고민’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영국의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점이 될 듯하다.

겨울이 유난히 추운 영국에선 매년 2만 명이 넘는 노인이 한파에 목숨을 잃는다. 가난한 노인들을 돕기 위해 정부는 연간 최대 300파운드(약 45만 원)의 난방비를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원금은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다. 별도의 소득기준을 두지 않은 것은 대상자를 가려내는 데 드는 행정비용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아무리 정교한 기준을 세워도 지원 대상에서 억울하게 빠지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지적 때문이다.

부자에게도 혈세를 지원하는 이 제도는 도입 당시 상당한 논란이 됐지만 결국 정부 뜻대로 시행이 됐다. 그러자 민간에서 이를 보완하는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고소득층과 저명인사들 사이에서 “내가 이 돈을 받아선 안 된다. 어려운 사람에게 돌려주자”는 반납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겨울나기(Surviving Winter)’라는 이름의 이 기부 캠페인은 올해 10년째를 맞고 있다. 지금도 영국의 복지단체에는 이들이 반납한 돈이 한 해 수십억 원씩 모여 빈곤 노인들에게 향한다.

현 상황을 보면 한국의 재난지원금도 영국과 같은 이유로 전 국민에게 지급될 공산이 크다. 서민과 고소득층을 100% 공정하게 가를 방법도 없고, 그게 있다 해도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전 국민에게 주되 고소득자는 나중에 환수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이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줬다 뺏는 것 자체가 무리인 데다, 환수 대상자 기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혼란이 불가피하다. 지원을 받는 자와 도로 뺏기는 자로 나라 전체가 또 갈라질 것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영국처럼 고소득층의 자발적 기부를 유도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려면 일단 시스템부터 바꿔야 한다. 지금은 지원금을 기부하고 싶어도 받은 자리에서 바로 반납할 수 없다. 쿠폰이나 전자화폐 형태로 받아 알아서 소비하고, 그 액수만큼을 복지단체에 따로 기탁해야 한다. 그러나 재난지원금 기부는 이렇게 복잡하면 안 된다. 주민센터에서 사인 한 번에, 또는 스마트폰 앱에서 클릭 한 번에 간단히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자리에서 소득공제 혜택도 주고 기부인증서를 발급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릴 수 있게 하면 더 좋다. 전액 기부가 부담스럽다면 절반만 할 수 있는 옵션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이 정도의 시스템은 우리 핀테크 기술이라면 바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집단의 의지를 확인한 바 있다. 코로나도 같은 방식으로 극복 못 할 이유가 없다. 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는 계층 간 편 가르기로 갈등을 조장하기보다 국민 전체의 선의(善意)를 믿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겨울나기#기부 켐페인#자발적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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